- 행복한 이야기 -/북한산 산행

북한산 국립공원 64봉= 노적사 ,북장대터, 기린봉=북한산의 유적들

klcyoh 2009. 9. 2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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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19일

 [내 안에 온 우주가 존재하는 이치]

상파울루에서 태어나 뉴욕에 자리를 잡은 어느 화가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천사와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

연금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내면에 온 우주를 담고 있으므로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 그런데 내 말의 요점을 짚어줄 적절한

비유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 때,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화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스튜디오 창밖을 보라고 말했다.

"무엇이 보입니까?"

그가 물었다. "그리니차빌리 거리요"

몇몇이 대답했다. 화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종이 한 장을 창유리에 붙였다.

그리고 주머니칼로 그 위에 작고 네모난 구멍을 냈다. 

자 이제 무엇이 보일까요?"

"같은 거리겠죠"
누군가 대답했다.

화가는 종이에 여러 개의 네모난 구멍을 뚫더니 말했다.

 "여기 이작은 네모난 구멍들이 거리를 담고 있듯 우리 각자도 우주를 담고 있읍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정곡을 찌르는 그 비유에 박수를 보냈다.

"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에서

 

 

 우리는 산을 걸으면 풀잎 하나에 스치는 바람에도

 우주의 수많은 기적이 어우러져 있음을 알고 

 겸허한 모습으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북한산성도착 "4시26분 백운대 정상위의 사람 숫자 까지 보인다.

북한동 음식점 갈림길:4시50분

중성문 :5시04분

노적사 :5시11분

훈련도감터:5시24분

 

 출근길의 선명한 날씨 때문인지  북한산에 마음이 닿는다.

 지도에는 없지만 북한지에 나온 표시대로

 좌측 노적봉  바로 밑의 봉우리가 기린봉일것이라 생각했지만

바로뒤의 조금 더 높은 봉우리로 인하여 결정은 유보함.

  북한동 식당가 다리 건너자 마자 좌측으로 백운대길이며

우측으로는 대동문을 가는 길이거늘 20년동안

우측 이 갈림길을 갈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도 신기할 다름이다.  

 중성문

 

 좌측 노적사로 넘어가는 다리.

 

 

 

 

 

 

  

 중앙 돌출된곳의 역삼각 그림자 위로 바위에 암벽하는분 3분이 너무 작게 보인다.

 

분명 라이락 일터인데 노적사 뜰안에 있어서 인지 고풍스럽게 뒤틀려졌다.

 

 

 노적사 밖으로 좌측 노적봉 가는 길의 표지판은 2개가 나란히 누워 있다.  

 

 

 여기부터 길이 없어지고 깨어진 바위 위를 어림 짐작으로 계속 올라가야

노적봉에 닿는다. 숲은 깊어 산은 안보이고 봉우리까지 길은 제법 멀다.

훈련도감터

 

 노적봉의 기슭. 볼수록 대단한 암석 봉우리이다.

 정면에 보이는 의상 능선 .좌측 뽀족한 봉우리가 용출봉 -용혈봉-증취봉

 정면 좌측끝의  의상봉과 국녕사

 원효봉

 염초봉 

 빨간점이 암벽하는 분들이다.

 

 

 백운대가 장엄한 모습으로 바로 눈에 들어온다.

 우측이 파랑새 바위

 

 

 노적봉 밑에 닿으면 산 기슭 경계를 타고

좌측 백운대 쪽으로 타고 가다 보면 내려가는 길이 생긴다.

 볼수록 엄청나다.

이 숲길이 내가 지나온 길인것 같은데 짧지 않다.

  전체를 조망하고 지휘 할 수 있다면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상식적으로

북장대지 일것이고   조금 넓은 터와 앞 봉우리가 보이는 이곳도

봉우리의 모습을 약간 갖추었기에 기린봉 일지도 모르거니와 혹은

 북장대터와 기린봉이 같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산부추

 식사 중 아는 분의 전화를 받고 급히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더 늦었으면 문제가 있을 법 한 길이지만 분명히 이어진 길이다.

 

 조금 전 위에서 보았던 봉우리 정상의 무덤 . 북장대지이다.

 오르고 내리는 도중 단 한사람의 등반인들을 만나지 못한 코스였다.

이 길은 식당 주방 안으로 해서 나오게 되어있는데 민망스럽고 의아하다.

식당 옆 사찰  보리사 뒷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기린봉을 쉽게 가는 길이다.

 대서문루 위에서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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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의 산하 산행기에서 san001님의 글을 복사함.

 장대(將臺)란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세운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북한산성 안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등 3개소의 장대가 있었다. 이 중 북장대는 북한산성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여 산성 안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장대로 노적봉에서 서쪽으로 보리사(백운대와 산성계곡 갈림길 근처의 절)까지 뻗어 내린 능선, 즉 북한산성의 두축을 이루는 원효능선과 의상능선 사이를 관통하는 능선상의 기린봉에 위치한다.

국녕사 갈림길, 중성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노적사로 가는 운하교가 나타난다. 노적사가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등산객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노적사 주위가 뒤로는 거대한 노적봉을 배경으로 가로막혀있고 좌우로는 완만한 사면을 이루어 바람이 잠잠하고 햇볕이 잘드는 북한산에서 가장 좋은 터라 할 수 있다.

노적사 대웅전 우측으로 등산로 아님이라는 길로 올라 능선을 따라 가면 노적봉 대암벽을 바라보면서 노적봉으로 직접 오르는 전망대 등산로. 북장대능선은 대웅전 아래 공사가 한창인 건물 좌측으로 향한다. 뚜렷한 길 흔적이 있다. 짧게 오르면 바로 능선. 등산로 표시판이 있다. 표시판 위에는 너른 공터에 있는 무덤이 있다. 사방이 탁 트인 한눈에 보아도 천하의 명당자리.

무덤에서 능선을 따라 곧장 오르면 노적봉의 대암벽이 가로막아 길이 끊어진다. 북장대능선은 무덤 좌측 길을 따라 텃밭을 지난다. 건너편으로는 의상능선과 국녕사의 대불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차장에서의 호쾌한 의상능선도 여기서는 부드러운 굴곡으로 바뀐다. 잠시 후 ‘戊’가 그려진 거대한 바위를 만나고 바로 옆이 훈련도감유영지이다.

훈련도감은 북한산성 축조 당시 삼군문(三軍門)의 하나로 수문 북측에서 원효봉능선과 위문에서 용암봉까지의 주능선상의 산성 및 수문, 서암문(시구문), 백운봉암문(위문)의 축조를 담당한 부대이다. 당시 북한산성의 축조는 훈련도감이외에 어영청과 금위영이 담당하였으며 금위영은 용암문에서 보현봉까지의 주능선상의 산성과 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을, 어영청은 보현봉에서 의상봉까지의 의상능선 산성과 대남문, 청수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유영지. 북장대를 비롯 원효능선 일대의 산성관리와 총포, 자재, 군량을 모으거나 비축하는 일을 수행한 훈련도감이 있던 옛터이다. 주위에는 예전의 기단과 석축을 쌓아 만든 정사각형의 우물, 그리고 건물터인 주춧돌 8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잡초가 무성한 유영지에는 300년을 시간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그대로 남아있다.

유영지를 뒤로하고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단숨에 능선안부. 안부 너머로 하산하는 길이 대로 같이 넓다. 건너편 원효봉능선 중턱의 상운사와 그 아래의 대동사, 염초봉 및 백운대가 지척에 보인다. 자주 보는 봉우리들이지만 느낌은 새롭다.

북장대. 숙종 때의 북한산성 축성사실을 기록한 북한지에 의하면 북장대는 중성문의 북서쪽에 위치한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기록에 의하면 노적봉 아래에 있는 기린봉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봉우리가 기린봉일까? 하여튼 일단 올라가 보면 북장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좌측 봉우리로 향한다.

안부에서 4분만에 봉우리에 올랐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30미터 앞으로 나가자 무덤이 있는 공터. 여기서부터 내리막이다.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방에 훤히 뚫린 최고의 전망대 자리. 누구나 여기가 북장대 자리일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아무리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하나 여기가 분명 기린봉 일텐데 이 꼭대기에 주춧돌 하나 보이지 않을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북장대가 있었다면 누가 가져가기도 힘들었을 주춧돌을...

산꼭대기에 있는 무덤. 누가 여기까지 와서 묘를 썼을까... 이 능선을 따라 쭉 내려가면 보리사가 있다. 북한산성 안의 거대한 계곡 두 개가 보리사 앞에서 합수되며 보리사 대웅전 뒤에 위치한 모 재벌가의 무덤... 노적봉에서 시작한 북한산의 기운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인가? 묘 사이의 연관성과 풍수지리적인 관점이 궁금해진다.

이번에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안부에서 노적봉 방향으로 오른다. 노적봉 대암벽 바로 직전의 봉우리가 혹시 기린봉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흙길을 조금 지나면 바로 바윗길. 위로 조금 오르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북장대능선과 원효봉, 의상봉능선의 장쾌한 전망... 위문, 동장대, 대남문까지 북한산이 사방팔방으로 구석구석 보인다. 계곡을 통해 백운대로 오르는 등산객들의 모습 또한 잘 관찰된다. 이래서 장대가 이 능선상에 세워졌던가... 역시 북장대능선은 북한산 전망대능선이라 할만하다.

마지막 봉우리(?)에 오르면 대암벽의 시작이다. 장대가 세워질 만한 공간이 없다. 한동안 노적봉 대암벽을 관찰한다. 혹시 그냥 오르는 길이 있을까 하여... 노적봉의 우측은 클라이머들의 연습장소이지만 좌측은 노적봉 중턱까지는 장비 없이도 가능한 듯 보이지만 일부 구간이 관건인 듯하다.

안부로 내려와 반대편 방향(원효봉이 보이는 방향)으로 하산한다. 10분정도면 백운대등산로(등산로아님 표시 있음)와 만난다.

아직까지 북한산의 수풀 속에 파묻혀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북한산성.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북한산성이 복원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성의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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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카페 구름모자(산과 여행)에서 복사함.  

북한산의 유적

 

북한산성은 방어시설인 성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사시 북한산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군사들이 기거하면서 외적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따라서 성벽과 더불어 행궁, 경리청, 창고, 장대, 사찰 등 각종 시설물들이 있었다.


북한산을 등산로만 따라 무심히 걸으면 최근 복원된 성가퀴와 성문만 볼 뿐 특별히 북한산성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대다수의 유적들은 파괴되고 대부분 흔적만이 남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유적과 흔적이 남아 있음에 놀라게 된다.


산성과 성문을 제외한 나머지 북한산성 유적은 대부분 산성계곡을 따라 흩어져있다.

이 밖에 북한산성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성의 흔적을 하나하나 답사하면

산행 못지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산성〕


■ 산성의 길이

길이는 약 8.5km (당시 표기법에 의하면 7620보)로 현재 원효봉능선 구간은 「훈련도감」에서

 산성주능선 구간은 「금위영」에서 의상봉능선구간은 「어영청」에서 축성하였다. 능선길이는

그 이상 되지만 능선의 형태에 따라 성을 축조하여 위험한 구간에는 성벽이 없고,

일부 구간은 여장(如墻, 성가키,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으로 의상봉능선과

원효봉능선 등의 비탈 사면에 있다)만이 있는 형태로 나머지 구간은 체성(성의 몸체)에

여장을 덧붙인 형태로 축성되었다.


■ 성문 (별도 자료 참조)


■ 성벽의 구조

성벽은 체성(體城)성체와 지축여장(只築女墻)으로 나누어져 있다. 체성은 성벽의 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의 높이는 체성을 기준으로 한다. 지축여장은 체성위에

올려진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하며 성첩 또는

성가퀴라고도 불린다. 

성문이 있는 구간에서는 체성(성벽의 몸체)을 쉽게 볼 수 있으나, 능선의 중간 구간에서는

성가퀴만을 볼 뿐 성벽을 볼 수가 없다. 보통 눈에 보이는 성가퀴가 자연적 능선위에

축조하였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성가퀴를 넘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가는 온전한 성벽(몸통)이 아직도 분명하게 남아있어 그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북한산성의 복원의 대부분이 체성 복원이 아니라 성가퀴 복원이다.

현재 체성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시구문에서 산성계곡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벽이다.

약4~5m의 체성이 아직도 뚜렷히 남아있다. 의상봉능선을 따라 가면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으로

하산하는 도중 옛 성벽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며 증취봉에서 부왕동암문으로 거의 다 내려오면

성가퀴 너머로 세월의 이끼가 그대로 묻어있는 옛 성벽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산성주능선에서도 등산로상에서는 하얀 성가퀴만 눈에 들어오지만 성가퀴 너머로

눈을 한번만 돌리면 역시 옛 성벽을 볼 수 있다. 

(주능선상에 체성만 남아있는 성벽)

(의상능선에서 체성만 남아있는 성벽)

(용암문 옆 체성과 성가퀴가 같이 있는 성벽)

 

■ 성가퀴의 구멍 형태  

성가퀴를 안에서 보면 바깥으로 뚫린 구멍이 모두 정사각형 형태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두 개가

정사각형이라면 한 개는 직사각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구멍을 보면 두 개는

수평으로 반듯하게 뚫려있지만 한 개는 45도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파져있는 것이다.

이 구멍들은 아래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구멍으로 수평 구멍은 먼 적을 물리치는

원총안, 경사를 이룬 구멍은 가까운 적을 물리치는 근총안이다. 

(성가퀴에는 세개의 구멍이 있으며, 좌우는 원총안, 중앙이 근총안이다)


■ 수문지

북한산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은 문이다.

수문지는 북한산성매표소에서 계곡길을 따라 약7분 올라간 지점에 있는 경국사 앞 계곡에 위치한다.

수문은 14성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높이 16자, 너비 50자의 규모이다.

4대문의 성문이 보통 높이 11~13자, 너비 13~14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수문의 흔적은 계곡 양 옆에 수문장처럼 서있는 거대한 바위에서 산비탈로 이어지는 성벽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1915년 폭우시, 중성문의 수문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물이 일시에

수구를 무너뜨리며 그 여파로 수문이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문지)


■ 중성문의 옆 수문 흔적

중성문의 옆 계곡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살펴보면 계곡 양 옆의 바위에 홈이 파진 것을 볼 수 있다.

성벽의 흔적으로 2차 방어선의 개념을 가진 중성문에서 물을 모아 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향해

수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설도 있다.



〔건물 및 건물지〕


■ 장대

장대란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든 장군의 지휘소로 전체의 움직임을 관찰 할 수 있도록 전망이 좋은

장소에 만들어졌다.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 모두 3개의 장대가 있었으며 현재 동장대만이 복원된

상태이다.  

동장대는 산성주능선상의 북한산대피소와 대동문사이에 위치하며 우이동을 굽어 볼 수 있으며

대남문을 비롯 산성계곡과 행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남장대는 의상봉능선상의 716봉(청수동암문 바로 옆)에서 북동쪽을 굵게 뻗은 능선(일명 남장대능선)

상에 있으며 대남문, 대성문, 동장대 그리고 의상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등산로가 행궁지(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 보아 유사시 보고체계를

짐작케 한다.

북장대는 중성문 북서쪽, 즉 노적봉에서 산성계곡으로 뻗어 내린 능선(북한산성계곡과 백운대로

오르는 계곡 사이의 능선)상의 중간봉우리에 설치된 장대로 산성계곡, 중성문 일대와

북문을 바라볼 수 있는 장대이다. 

(동장대)


■ 행궁지

행궁은 유사시 임금의 거처가 되는 궁궐로 산성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대남문으로 약4km  오르면

 보이는 「청수동암문 1.46km, 대남문 1.45km, 산성매표소 4.0km」이정표에서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약20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안내판에는 옛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황량한 자취만 남아있다지만

사진을 보면 생각한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사진으로 전해질 정도로 잘 보전되어 오던 행궁.

이는 고종 때 대규모 산성 및 행궁 보수를 통해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그 옛날 또 하나의 궁궐을

북한산성에 만들어 놓았지만 외세의 침입도 아닌 1915년 대홍수에 무너져 없어졌다.

현재 행궁지 자리에는 나무와 잡풀이 공터를 뒤덮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축대와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주춧돌. 무성하게 자란 풀을 들쳐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있는 주춧돌을 볼 수가 있다.

행궁지에서 내려오는 등산로 옆으로도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공터가 단계적으로 보인다.

지금은 야생화들로 뒤덮여 버린 공터. 행궁지뿐만 아니라 보조시설까지 생각하면 그 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추측이 가능하다.

등산로는 남장대능선으로 이어져 의상봉능선상의 716봉으로 연결된다. 남장대능선에는 남장대지가

남아있어 그 당시의 보고체계를 짐작케한다. 

(행궁의 옛사진)

(현재의 행궁지)

(행궁지 주위의 축대)


■ 훈련도감 유영지(訓練都監 留營址)

조선 후기 군부대의 하나인 훈련도감이 있던 자리로 노적사에서 북장대능선으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다.

지금은 주춧돌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이다.


■ 어영청 유영지(御營廳 留營址)

조선 후기 군부대의 하나인 어영청이 있던 자리로 현재 대성암 자리에 위치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어영청은 보현봉에서 수문남측까지 즉 의상능선상의 성벽과 소남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을 만들었다. (안내판의 내용으로 실제는 부왕동암문이 소남문으로 이중 표기됨)

현재는 유영지터가 밭으로까지 사용되고 있다. 


■ 금위영 유영지(禁衛營 留營址)

중흥사지에서 대남문으로 가다 대동문, 보국문 갈림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정면으로 거대한 축대가

눈길을 붙잡는다. 분명 인공적인 축대, 그 규모가 제법 거대하다. 이 축대 위가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이다.

금위영은 북한산성 축성시 훈련도감, 어영청과 더불어 3군문의 하나로 용암봉 동남쪽에서 보현봉까지의

 축성 및 소동문(대성문 또는 대남문이라는 두 가지 설), 대동문, 용암문, 동암문(보국문) 축성한

부대로 축성이후 효율적 산성 자치와 관리를 위해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등을 관할하였다. 

원래 대성문 근처에 있었으나 위치가 높아 축성 4년 뒤인 171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위영터 역시 잡풀과 나무만이 자라고 있는 빈 공터로 맞은편에 당시 이전 사유를 기록한

가로 약2m, 세로 약1m 규모의 북한산성금위영이건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가 구석에 세워져 있다.

금위영터에서 바라보는 노적봉과 백운대의 하얀 암벽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금위영 유영지 축대)


■ 경리청 상창지((經理廳上倉址)

경리청이란 북한산성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산성 군량미관리가 주된 임무가 되었다.

 그에 따라 창고가 산성내 여러 곳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상창은 행궁지 갈림길 바로 옆에 터만

남아있다. 이 외 중창은 중흥사 옆에, 하창은 대서문 안쪽에, 호조창(왕을 위한 곡식 비축), 평창(탕춘대성) 등이 있다.

현재는 300년이 지난 잘 다듬어진 거대한 바위들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는 잡풀이 무성한 너른 터만이 남아있다.

(경리청상창지 축대)


■ 산영루터(山映樓址)

산영루는 누관(樓觀)이다. 누관이란 누각이나 망루의 뜻으로 전망을 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산영루 이외에도 중흥사 앞에 항해루(沆瀣樓)이 있었으며 이 누관은 모두 다리위에 만들어진

시설물이다.

산영루터는 선정비 바로 옆에 주춧돌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 일대는 너른 암반과 시원한 소

그리고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바위 사면이 어우러져 풍류가 절로 우러나오는 곳이다.

 



〔사찰터〕


■ 중흥사지(重興寺址)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북한산성 축성의 관할본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360명의 승군을 산성내 11개 사찰에 주둔시켜 관리하던 총지휘본부 역할도 했던 사찰이다.

숙종 때의 승려인 「성능」이 팔방도승통 겸 팔도도총섭이 되어 증흥사에 기거하면서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에 관한 주요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숙종 37년 산성 축성할 때부터 30여년간 증흥사에

 머물며 산성에 관한 일 이외에도 중흥사와 태고사를 중창하였고, 용암사(북한산성대피소 자리,

폐사), 서암사, 진국사(현재 노적사), 봉성암, 원효암을 창건하였다. 또한 북한산성에 대한 사료를

정리하여 북한지를 편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현재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남문 방향으로 약3.5km 오른 지점인 북한산대피소

갈림길(이정표 : 북한산장 0.8km, 대남문 1.92km) 바로 옆에 있으며 얼마 전까지 너른터와 축대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로 최근 대웅전이 복원공사 중이다.

(중흥사 옛사진)

(현재의 중흥사지)

(중흥사지의 축대)


■ 부왕사지(扶旺寺址)

북한산성 축성 이후인 조선 숙종 43년(1717년)에 심운이 창건한 사찰이다. 산성계곡에서

부왕동암문으로 오르는 도중에 위치한 사찰로 현재는 높이 2m에 달하는 거대한 주춧돌이 남아 예전의 영화를 전한다.

(부왕사지 초석)


■ 삼천사지(三千寺址)

삼천사지는 증취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옛 삼천사의 절터이다.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삼천사 위치보다 월씬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찾기가 어렵다.

지금도 석축, 주춧돌 등 일부가 남아있다.


■ 용암사지 석탑

용암사는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 세워진 사찰로 현재의 북한산대피소 자리에 있었다.

옛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목재로 만든 대피소 옆에 무너진 석탑만이 그 역사를 전한다.

지금은 석탑이 돌무더기처럼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북한산성 축성 총 책임자인 성능에 의해 창건되었다.

(용암사지 자리에 있는 북한산 대피소)

(무너진 용암사지 석탑)

 

 


〔음각 글씨 및 그림〕


■ 소남문의 옛 글자 흔적

소남문은 의상봉능선상의 부앙동암문을 말한다. 문 바깥(삼천사방향)에서 홍예 형태를 이룬

문 위쪽을 보면 희미하게 「小南」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 대성문의 음각 글씨

대성문을 산성 밖에서 바라보면 성문 우측 성벽에 축성을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대성문의 음각글씨, 금영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 백운동문 음각 글씨

백운동은 산성계곡 노적사 갈림길에서 중흥동까지 구간의 계곡으로 추정되며, 이 계곡의 이름을

거대한 바위면에 글씨로 새겨 놓았다.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상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다.

 


■ 청하동문 음각 글씨

청하동은 산성계곡에서 부왕사지까지 구간의 계곡으로 추정되며, 이 계곡의 이름을 거대한 바위면에

글씨로 새겨 놓았다.



〔비석〕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遺址)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국보3호)가 있던 자리이다.

원래의 비봉 정상에 있었느나 풍화가 심하여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도 원래 있는 자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라 진흥왕 16년(555년)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비는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판독함으로써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비봉 정상의 북한산 순수비 옛모습, 출처 서울문화재)


■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북한산성 축성을 담당한 3군문의 하나인 금위영이 소동문(보국문) 근처에서 현재의 자리를 이전한

사유와 금위영의 축성시 담당 범위와 관리범위 등을 기록한 비.

숙종 41년(1715년) 금위영이 이전한 후 만든 비로, 비문의 글은 도제조 이이명이 적었다. 


■ 선정비군(善政碑群)

부왕동암문 갈림길을 지나 중흥사지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면 용화사 아래의 비탈진 바위면에

세워진 23개의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들은 대민선정비, 청덕선정비, 영세불망비의 세 종류로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총융사의 재임시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00년대에 세운 것이다.



■ 북한승도절목비문(北漢僧徒節目)

선정비가 있는 바위면에는 선정비와 더불어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이라는 319자의 명문이

가로 225cm, 세로 110cm의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다.

북한산도절목은 19세기 중엽, 산성내의 대사찰들이 피폐하여 승도가 흩어짐에 따라 책임자인

승군대장인 팔도도총섭의 임명시 발생하는 각종 폐단을 없애고 산성수호에 완벽을 기할 것을 촉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기타〕


■ 훈련도감 유영지 옆 우물

북한산 훈련도감 유영지 옆에 있는 우물로 직사각형의 형태로 아직도 그 우물벽이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출처 :북한산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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