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30
강릉 임영관은 사적 제388호로 중앙의 정 3품 이상의 관리들이 지방에 내려오면 유숙하던 강릉부의 객사로 고려시대에
세워져, 당시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제는 고려시대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인
객사문(客舍門 - 국보 제51호)만 남아있다.
1993년 강릉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하여 고려전기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는 시기의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낭청방(郎廳旁), 서헌(西軒), 월랑(月廊), 삼문(三門) 등 많은 수의 건물터와 이 시기의 청자와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암·수막새, 기와 등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기록인 임영지(臨瀛誌)의 재조한 내용과도 같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강릉부 객사인 임영관은 지난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 유적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내에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등 4개 건물이 복원되었다.
손실 된 많은 전각탓인지 공간은 너무 넉넉하여 그 구도가 깨어져 황량할 정도이다.
입구인 아문
바닥에서 기둥이 올라온 것을 각이라고 하고 2층으로 올라간 것을 루라고 한다.
의운루와 강릉부 관아 동헌 별당 .
칠사당.
강릉 관아는 고려말에 설치되어 조선말기에 폐지된 강을 대도호부의 행정관청이 있던 곳으로
여느 관청과 같이 이곳 강릉 관아도 당시 정부의 천주교 탄압 정책에 따라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오고
단순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름도 없이 무참하게 수많은 순교자들이 스러져 간 마음아픈 곳이다
강릉 관아는 크게 강릉읍성과 동헌 영역 및 객사 영역으로 구분되고 동헌영역에 칠사당도 함께하고 있다
이 곳은 강릉부의 행정주심 치소로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에 의해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고 강릉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만 남아 있다가 2006년 임영관 복원에 이어
관아의 아문, 동헌, 별당, 의운루들이 복원되었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이 주재하던 조선시대 관공서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일곱가지 정사를 베풀던 곳이나
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 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구들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단청으로 채색이 되지 않았지만 공포의 형식은 갖추었고 단지 특이하게 물고기 형식의 고임 나무를 끼워 놓은 것은 처음 보는 형식이다.
굵은 나무와 어우러지는 작은 대나무들로 50여가지의 대나무 종류중 식견이 부족하여 대충 금명죽으로 판단해버린다.
의운루에 올라서 본 전경.
국보 51호인 객사문의 기둥은 보기 좋은 배흘림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간결한 맛배 지붕의 길이에 비해 높이가 높음에도 흉한 모습이 아니게 조화가 되어 있으며
저 정도의 굵기이면 나라에서 관리하는 궁궐 기둥의 굵기보다 조금 모자람이 있을 정도로 굵기로 위치의 실익을 많이 본듯하다.
임영관 중대청
궁과 사찰의 넉넉함은 기둥의 굵기와 공간의 넉넉함이 조화를 이루어 질때 편안함과 엄숙한 고요함을 느끼는데
많은 전각이 사라져있어서 인지 지나치게 터가 넓어 햇살에 외롭게 보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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