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2.01
오늘 비원이라는 곳을 가보려고 했다. 대강 검색을 하고 비원 앞에 서니
창경궁에서 종로가 막히면 돌아가던 길의 현대 건설 옆의 창덕궁안에 접해있는 후원의 이름 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왕비들의 후원이므로 계속 적인 설명에서 창덕궁 후원이라고 표현 한다고 했다.
반드시 입장 시간이 정해진 때에 가이드의 인솔이 있어야 하며 자유 입장은 목요일 하루 1만 원5천이라고햇는데
보통 날의 3천원과 가격 차이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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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과 서울의 문에 대하여 혼란을 겪어 천천히 조사해봤다.
간략 설명 (네이버 펌.)
문은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 숙정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이고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경운궁), 창경문, 경희궁 .운현궁.종묘
언젠가 인왕산에서 서울의 위치 선정과 문에 대하여 어떤 분의 설명을
들었는데 좌청룡 우백호로 서울의 위치를 잡고 각기의 문은 인의예지인이 다들어 있다고 하였다.
- - - - - - - - - 아래가 가장 적절한 것 같음- - - - - - - -
5대 궁궐
조선왕조의 궁궐은 여러 곳이 있었지만 대체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이 중심이 되어 왔다.
여기에 왕실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와 국토와 오곡의 신위를 모시는 사직이 동과 서로 자리하였다.
궁궐은 중세에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왕이 거주하며 통치하던 곳으로 세계적으로
규모를 장대하게 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여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였다.
즉 왕들의 배타적 공간으로서 함부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聖域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한 나라가 바로 서려면 도읍이 있어야 하고,도읍에는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여기에 현실적인 국가의 중심이며 권력의 소재처인 궁궐이 완성되어야 했다.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왕이 주로 기거할 목적으로 지은 정궁,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기간 거주하는 이궁,왕이 도읍을 벗어나 지방에 행차할 때 머무르는 행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을 정궁으로 하여 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을 이궁으로 그리고 수원의 화성을 행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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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정문 대한문(大漢門) 입장료 1,000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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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이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에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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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입장료 3천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
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외국인들은 별도의 가이드가 다른 코스로 인솔 한다.
왕이 다니는 가운데 길을 다른 사람이 다녔을 경우 곤장 80대 였다고 한다.
보통은 정2품까지만 정문을 이용하고
다른 품들은 별도의 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푸른기와 . 푸른 기와를 올린이유는 모르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다고 한다.
보기에도 벌써 눈으로 보는 맛이 달라 보인다.
옛 건물의 터는잔듸로 보호 해 놓았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 입장료 1천원
창덕궁의 비원에서 보니 창경궁의 온실이 담 넘어로 바로 보인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지은 것으로,
이 때 지은 집이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
통명전과 양화당·여휘당 및 사성각 등이다.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정전(正殿)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된 뒤에도 몇 차례의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한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
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으로 나눌 수 있다.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있는
중층삼간누문(重層三間樓門)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다.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이 명정전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開城)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다.
그 후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 이 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 오락장으로 삼았는데,
1910년(융희 4)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치고, 벚꽃나무를 잔뜩 옮겨 심어
일반에게 휴식처로 공개하여 오다가 1986년 8월 창경궁으로 복귀하였다.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
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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