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호로고루는 초기 백제계의 판축(版築)에 이어 판축 바깥에
돌을 쌓고 자갈로 다진 고구려계의 석축(石築),
그리고 석축 바깥쪽 하단에 돌기단을 쌓은 신라계의 축성법이 차례로 나타나
백제·고구려·신라가 이 지역에서 각축을 벌였음을 알 수 있는데 경순왕릉에서 나오는
길에 작은 표지판 하나에 농사깃같은 소로로
설마하고 지나다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별도의 주차장 시설은 있다.
넓은 고추 밭을 보니 토질의 물빠짐이 좋은듯 하다.
뽕나무가 많은 것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전부 뽕나무 길이다.
햇살을 피할만한 그늘이 전혀 없는 곳이다.
언듯 역사를 훝어 보기전에는 보기에 밋밋하고 감흥이 없는 곳으로 보인다.
여들여들한 쑥과 나물이 지천이다.
이정도의 위치면 봉화대도 있을 법하다
한쪽은 강을끼고 사방 넓은 시야를 가져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하였음에도 수성에 실패한것은 수위가 낮은
여름의 특정 부위로 순식간에 습격을 당하여 고구려에 편입된듯 하여 자료를 붙여 본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단행한 건 457년 즉위 12년째가 되던 해였다.
광개토대왕이 왜 등과 협력하여 신라를 위협하고 후연과의 전쟁을 틈타 고구려를 위협하는
아신왕을 굴복시킨지 얼마 되지 않아 장수왕은 남진의 의지를 평양천도라는 상징적 행위로 보여준다.
남진 정책은 왜 시작되었을까?
북쪽의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국내성의 요동지역도 안정화되자 장수왕은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되고
남진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고구려의 귀족들은 평양 천도를 하는 것을 많이 반대했다고 하지만 장수왕은
국내성 같이 척박한 땅에서 얼마 되지 않은 농산 수확물에 만족할 수 없었고 일단 평양성 주변의
너른 들판에서 곡식을 걷고 나아가 한강 유역을 확보해서 경제적 안정을 갖고 싶기도 하고 백제가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 등과 강화도 교동(신라시대 관미성 자리) 등을 확보하여 국제 교역을 통해 부국 강병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백제를 견제하고 백제의 숨통을 틀어막을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연과 고구려가
공동 운명체로 동맹을 맺는다면 북위와 백제가 고구려를 사이에 두고 동맹을 맺어 협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강유역을 거쳐 황해에서 곧바로 북위로 연결되는 것, 그리고 백제의 남서중국 해안 지역 차지는 큰 부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중국쪽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한반도만이 아니라
일본 일부, 중국의 동남부 지역을 차지하여 백제의 효력이 미치는 공간으로 삼아
국제적인 대국으로 성장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그걸 끝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475년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 지금의 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몽촌토성에
총지휘부를 구축하고 연이어서 진천 대모산성 청원 남성골산성,
현재 대전의 월평동에 있었던 월평산성까지 쳐내려 가면서 웅진으로 급하게 도망갔던
백제를 멸하려는 기세로 몰아부쳤던 장수왕의 남진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급박하게 몰렸던 백제의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파죽지세의 속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도 대전 월평동에서 공주 공산성까지 가는 데는 그리 멀지 않으며 하루 정도 행군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가까이까지 쫓아내려온 고구려가 자기들을 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개로왕을 잃은 백제는 혼돈에 빠지고 결국
문주왕이나 위덕왕 등이 불과 2~3년만에 연이어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극도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보다 그나마 수습이 된 후에도 고구려는 한성을 회복하겠다는
희망의 실마리마저 효과적으로 아예 싹을 잘라버리는 전략을 펼쳤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던 중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아차산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곳이 고구려가 하남 위례성을
마주 보며 공성을 하기 위해 쌓은 성이자 그 이후 한강 유역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신라와도 크게 맞서 싸웠던 곳임을 찾아내게 되었다.
고구려는 후연에 이은 북위 북연과의 관계를 설정한 후 군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농사짓기엔 적당하지 않은 국내성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기름진 땅에서 농작물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남진을 결정하고 증조부 고국원왕의 원수 국가인
백잔(고구려가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말)과 남쪽 경계를 다투기 시작해 장수왕은 한강 이북의 58개성을 점령하면서 백제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된다.
당시 풍납토성의 위인 아차산성으로 직접 가는 루트보다 약 15km 정도를 우회에 비교적
수심이 얕아 말로 쉽게 건널 수 있는 호로고루성에서 육계토성과 칠중성을 무너뜨리고 연천
무등리산성 당포성 등을 거쳐 파주에서 의정부로 넘어가 구리지역에서 망우리,용마산,아차산에 성을 쌓으며
한성백제 코앞에서 위례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압박을 실시한다.
1997년부터 우연히 산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보루 유적이 무려 20여기가 나옴으로써
지금도 발굴 작업을 통해 남한 내 최대 고구려 유물 유적이 집중된 곳으로 아차산성은 주목받았다
보루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비교적 지그 거리에 20여개 넘는 보루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얼마나 치열한 싸움터였으며
고구려가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광개토대왕 때도 20만의 병사중 대다수 병사가 기병이었을 것이며 기병은 말 그대로 말의 속도로 파괴력을 갖는 부대다.
그런데 강을 말과 함께 건너는 데는 곤란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배를 만들어 배로 건너는 동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준비가 없이는 풍납토성 앞의 아차산성으로 직접 내려오는 루트를 택하기 어려워
고구려군은 호로구루 같은 얕은 수심이 있는 곳에서 말을 타고 말 그대로 파죽지세의 힘으로 건너와 이곳 아차산에 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루들을 만들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남 위례성을 함락해 백잔을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말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반대로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코 앞까지 내쳐와서 수도 위례성을 위협하는 고구려군을 막아내지 못하면 곧바로
국가의 존망으로 이어지는 극도의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기병 2만이 왜에서 건너온 배에
가까운 무사들을 순식간에 박살 내며 일본까지 몰아낼 정도로 기병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더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결전을 앞두고 475년의 그 당시에는 이 근처에는 그야말로 긴장감이 숨막히게 흘렀을 듯 하다.
아차산성에 주둔하며 유사시에 한강을 건널 배를 만들고 백제처럼 목책을 쌓아 백제쪽의 기습 작전도 막고
그리고 우회하여 아차산성을 공격해 오는 것에 대비하여 치밀하게 보루를 세우고 봉화대를 세워
어떤 상황에서도 유리한 전세를 유지하려고 했던 고구려는 차근 차근 하남 위례성의 개로왕의 숨통을 죄어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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