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9.20
황포돗대 선장님이 설명해준대로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순왕릉을 찿았는데
신라의 왕들중 유일하게 경주에 묻히지 못한 왕릉길은
여느 시골 도로처럼 왕복 2차선으로 양쪽 가로수가 특히 아름다운 조용한 길이다.
화장실앞 잔듸 뒤로 풍경이 고요하다.
주차장옆 잔듸는 잘 관리되어 여러 가족들이 자리를 펴고 담소를 나누고 있어 정현이와 우리도 항시 가지고 다니는 자리를 펴더니
재식이와 다녀오라고 앉아 버린다.
그냥봐도 백성의 고통을 생각해 고려에 나라를 넘겨 주었음에도 차례를 지내는 비각도 없고
제기를 보관하는 고방도 수라간도 수복방도 없는데 우측의 건물에서 모든것을 해결 한듯하다.
줌을 당겨보았지만 문인석과 무인석조차도 없다.
전국에는 경순왕을 모시는 전이 6곳 있는데 이중
영주시 숭은전에서 춘향대제가 봉행되고 있으며
이곳 숭은전은 경순왕의 위민정신과 신라 문화를 지켜낸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4월 4일 향사를 봉행해 오고 있는 전(殿 대궐전)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고 개성으로 갈 때
수많은 신라인들이 그 행렬을 따라나섰다고 하며
경순왕은 안동을 거쳐 영주에서 하룻밤 묵어 죽령을 넘어
개경으로 갔다고 한다.
영주를 지날 때도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을 것으로 예상되며
지나가는 곳마다 경순왕을 추모하는 사당이 생기게 되었고
나아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묘로 난 길은 격식이 맞지 않아 홍살문을 세울 방향도 아니다.
미석에는 글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데 탁본은 있는것 같다.
그나마 숲이 깊어 위안이 된다.
돌아가는길 고개를 돌리니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띄여 그나마 좋은 자리라고 생각해본다.
경순왕의 무덤은 여러번 위치조차 찿을길 없이 유실되었다가 또다시 찿게 되어 자리를 잡았으며
운구 행렬이 경주까지 가지 못한것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기에 그 향수를 지닌 많은 사람들이 고려에 반감을 갖고 있을수도 있기에
조정에서 사망한 곳에서 백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는 학설이 맞는듯하다. 하단은 읽다보니 재미가 있어 옮겨 온글이다.
경순(敬順)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김효종의 아들 김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견훤은 박씨 왕조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는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하였다. 경애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견훤을 비방하고 왕건을 추켜세웠다. 이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던 견훤은 927년 9월에
고울부(경북 영천)를 공격하였고, 이내 말머리를 돌려 신라 도성을 유린했다
. 그 과정에서 공포에 질린 경애왕은 살해될까 염려하여 자살했다. 경애왕이 죽자,
견훤은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가 927년 11월이다.
비록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경순왕은 왕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견훤은 그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고, 심지어 병기를 모두 빼앗고,
병기를 만드는 기술자까지 모조리 압송해 갔다. 그 때문에 경순왕 휘하에는 군대가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이제 고려의 왕건뿐이었다.
그는 자기의 목숨과 종실의 운명조차 고려군에게 맡겨야 할 판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체를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통곡하며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다.
왕건은 견훤이 공산(팔공산)을 택해 돌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을 가할 요량이었다.
휘하 병력은 모두 기병이었고, 좌우에는 백전노장 김락과 신숭겸을 배치했다.
병력을 모두 기병으로 구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급히 달려왔다는 뜻인데,
이는 견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한 쪽은 오히려 왕건이었다. 고려군이 길목을 차단할 것을 예상한 견훤은
복병을 숨겨 뒀다가 공산 동수로 접어든 고려군 선봉대를 급습하여 궤멸시켰다.
그 바람에 왕건은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포위망을 뚫을 수 없게 되자,
신숭겸이 다가와 자기가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터이니,
그 사이에 변복을 하고 빠져 나가라고 제의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살신성인 덕분에 가까스로 혼자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5천의 기병과 함께 뛰어난 부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황천으로 가야 했다.
공산의 패전 이후 왕건은 계속 수세에 몰렸다. 928년 정월에는 강주를 구원하러
가던 원윤 김상이 백제 장군 흥종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5월에는 강주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강주 원보 진경이 죽고,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다.
또 8월에는 어렵게 얻었던 대야성이 다시 백제 장수 관흔의 수중에 떨어졌고,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인 죽령 또한 백제군이 장악했다.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와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사하였다. 의성은 고려가 경상 북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거점으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왕건이 ‘내가 좌우 손을 모두 잃었다’ 고 할 정도로, 홍술은 신임받던 장수였다.
그달에 순주(경북 순흥)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왕건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진노하였으나,
원봉의 이전 전공을 생각하여 그의 가족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순주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후에 원봉은 이때 항복한 책임을 지고 엄벌에 처해진다).
929년 10월에 견훤은 사벌의 가은현을 포위했다. 가은현은 견훤의 고향이었고,
아자개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되찾는 것이 견훤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가은현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자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왕건이 급히 군대를 이끌고 충주로 달려왔다. 그리고 가까스로 죽령 길을 뚫고
영주와 풍기 등을 순시하며 백제군을 공격할 틈을 엿보았다.
하지만 백제군의 기세가 워낙 강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은 고창의 고려군을 구하기 위해 여러 모로 방책을 강구했지만,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수들은 대부분 고창을 포기하자고 했다.
죽령을 넘어갔다가 퇴로를 차단당하면 꼼짝없이 죽을 판국이라
왕건도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창의 군대를 버리면 대세가 견훤에게 넘어갈 게 뻔했다.
왕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유금필이 강력하게 출전을 건의했다.
그는 3천 명의 아군을 적군에게 내줄 수는 없다며 절대로 고창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제야 왕건도 결심을 굳혔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 이외엔 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금필을 앞세우고 죽령을 뚫었다.
고려군이 죽령을 뚫자, 이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온 것이다. 선필의 부대는 주변 지형에
익숙한 군사들로 형성된 터라 왕건은 그들을 잘 활용하면 타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선봉에 선 유금필은 기세를 세우며 막아서는 백제군을 잇따라 궤멸시켰다.
그 덕분에 왕건 군대는 고창으로 진입하여 병산에 진채를 내릴 수 있었다.
견훤의 군대는 거기서 불과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며 대치했다.
이렇듯 양쪽 진영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는데, 왕건에게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그 주변의 신라 민병대를 이끌고 있던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고려군에 가세한 것이다.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했다. 싸움은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결과는 왕건의 대승이었다. 견훤은 패배하여 병력 8천을 잃고 낙동강을 넘어 남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백제군이 퇴각하자, 왕건은 곧 재암성 장수 선필을 사신으로 삼아 경순왕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경순왕은 반색하여 사신을 보내 왕건을 만날 것을 청하였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의탁할 속내를 드러내자, 그나마 신라 신하로 남아 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경순왕은 931년 2월에 태수 겸용을 보내 왕건과 만나기를 다시 청했다.
왕건은 경순왕의 청을 받아들여 50여 명의 기병만 거느린 채 신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경순왕은 자기의 사촌 아우 김유렴으로 하여금 성문 밖에서 왕건을 영접해 오도록 하였다.
왕건이 도성에 당도하자, 그는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왕건을 맞이하여 대궐로 와서
서로 마주 대하며 예를 갖춰 절을 하였다.
경순왕은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푼 후에 술기운이 감돌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 나라의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며 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무엇으로 이 통분을 대신할 것인가?”
경순왕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절을 한탄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함께 흐느껴 울었고,
왕건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경순왕을 위로했다.
왕건은 그 뒤로도 두 달여 동안 서라벌에 머물다가 5월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경순왕은 혈성까지 따라 나와 송별하고, 사촌 아우 유렴을 볼모로 삼아 왕건을 따라가도록 조처했다.
왕건은 서라벌에 머무는 동안 휘하 군사들에게 절대로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엄한 군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서라벌 백성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은 말하길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땐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 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 고 하였다.
송악으로 돌아간 왕건은 8월에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내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선물하고,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하사했다.
이렇듯 왕건이 지극 정성으로 호의를 표하자, 경순왕은 왕건을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그 무렵, 견훤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계략을 짜고 있었다
. 백제는 910년에 나주 앞바다에서 왕건에게 크게 패한 뒤로 거의 20년간 해군을 움직인 적이 없었는데,
견훤은 그동안 해군력을 키워 과거의 오명을 씻고자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왕건은 기세를 세우며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932년 6월에 백제 장군 공직이 투항해 왔고,
7월에는 자신이 직접 일모산성(청주 문의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견훤은 느닷없이 수군을 움직였다. 그해 9월 백제의 해군장수 상귀가 수군을 이끌고
고려 도성의 젖줄인 예성강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포구를 장악하고,
그곳에 정박해 있던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또 저산도에서 키우고 있던 군마 3백 필을 앗아 갔다.
10월에는 해군장수 상애가 북방의 섬 대우도(평북 용천)를 점령하여 거점을 형성했다.
창졸간에 도성 주변과 후방 지역을 공격당한 왕건은 몹시 당황했다.
대광 만세에게 해군을 안겨 대우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만세는 백제군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그 일로 왕건이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문득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당시 고려의 맹장 유금필은 정치적인 모략에 휘말려 백령도에 귀양 가 있었다.
그런데 대우도가 약탈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금필이 백령도와
그 주변의 어부들을 모아 수군을 조직하여 상애의 함대를 공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금필과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린 상애는 함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하지만 상귀와 상애의 해상을 통한 공략은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왕건은 육지에서는 밀리더라도 바다에서만은 항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해 온 터였다
. 왕건은 그토록 위용을 자랑하던 고려의 해군이 무력하게 무너지고 안방마저
유린당했으니,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때 경순왕은 고려에 의탁한 이후로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고, 국정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932년 4월에는 집사시랑 김불, 사빈경 이유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을 하면서
아직까지 신라라는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후당에서는 이미 신라를 망한 나라로 판단하고 있었다. 후당 명종은 933년에 고려에는 사신을 보내 왕건을 고려 왕에 책봉하고 조서를 보내왔지만, 신라에는 책봉사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왕건은 상애와 상귀에게 당한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 934년 9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길에 올랐다.
왕건이 운주로 진출하자, 견훤도 갑사 5천 명을 직접 이끌고 달려왔다. 그
러나 견훤은 굳이 왕건과 싸울 마음이 없었다.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말로 화친을 제의했다.
“양쪽 군이 서로 싸우면 양쪽 모두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무지한 병졸들만 수없이 살상될 것이다.
화친을 맹약하고 각자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견훤의 화친 제의를 받고 왕건도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묻는데, 유금필이 나서서 결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결국, 유금필의 주장을 받아들인 왕건은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눌려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백제군 3천 명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유금필의 대활약으로 고려군이 운주를 장악하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그 위세에 눌려 스스로 항복해 왔다.
왕건은 이런 기세를 몰아 몇 달 뒤에는 유금필을 앞세워 나주 탈환 작전에 나섰다.
나주는 이미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나주의 일부가 산성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긴 했지만,
본국과 연락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나주 탈환 작전에 대한 결과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견훤이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한 것을 볼 때,
유금필의 나주 탈환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고려에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 무렵부터 심한 내분을 겪는다
. 견훤은 이미 69세의 노인이었지만, 아직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서 십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해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주 전투에서 물러난 후에야 자기가 이미 늙었음을 절감하고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하지만 금강의 왕위 계승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는 신검이었고,
많은 신하가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금강을 태자로 지명했다.
신검을 위시한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반정을 주도한 인물은 이찬 능환이었다. 당시 견훤의 차남 양검은 강주에 도독으로 가 있었고,
삼남 용검은 무주 도독으로 가 있었다. 능환은 이들 둘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반군을 형성하였고,
이 둘이 군대를 이끌고 완산주로 밀려들었다. 그들의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견훤은 창졸간에 들이닥친 반란군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갇혔고, 금강은 죽음을 당했다.
사건의 전후 관계로 볼 때 신검과 금강은 배다른 형제이다. 신검은 적출로서 장자였고,
금강은 서자였던 셈이다. 즉, 견훤이 서자인 금강을 태자에 앉히자, 적자 세력들이 대거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신검은 반정 이후에 견훤의 측근과 금강의 비호 세력들을 대거 척살했다.
한편,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왕건에게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자기도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쳤다.
그런 가운데 신검은 그해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반정을 일으킨 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즉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뜻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을 무마하거나 척살하는 데 소용된 세월이었다.
신검이 왕위에 오르던 그때,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자기의 생각을 공포한다.
경순왕은 백관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가 되었고, 국세는 쇠락하여 우리 나라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하여 이제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 말을 듣고 태자가 이렇게 간언했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린 것이니,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스스로를 다지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망할지언정 어찌 일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그러나 경순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고립과 위태로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약하지도 못한 탓에 그저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짓이 아니다.”
경순왕은 곧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개골산의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가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 불리었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대상 왕철 등을 보내왔다. 항복을 받아들이고, 경순왕을 영접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신라의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송악에 이르자, 왕건은 교외로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위로했다.
그에게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자기의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또한 12월에는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다.
대세는 그렇게 왕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신검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는 신검이 자기 세력이라고 규정한 친척들에게조차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다. 이 대열에는 물론 견훤도 합류했다.
출병한 왕건의 군사를 세분화해 보면 고려군 4만 3천 명과 지방 호족 및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 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고려 연합군과 신검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선산)이었다. 이 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게 대패한 뒤 완산주로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이 견훤에게 항복하여 싸움을 포기하는 가운데,
연합군이 추격을 계속하여 황산(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신검이 투항할 뜻을 전해 오자,
왕건이 완산주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박영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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