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06
18.627KM의 한양도성 전체를 걸면 약 3,660 칼로리가 소모되고 시간은 10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어떤 소개 책자는 16시간)합니다.
무더운 여름 비가 때맞춰 하루종일 내린다고 하여 흥인지문부터 (동대문)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봅니다.
우선 성옆의 관리소에서 한양 도성 스탬프 투어 지도를 받고 어린 선비의 인물 도장을 찍습니다. (어플도 있습니다. )
이 스템프는 흥인지문(동대문) 문과 ,-숙정문(말바 위안 내소)-돈의문(강북 삼성병원 ) 경비실-숭례문(남대문)렇게 4곳을 찍어야 완주기념 배지를 줍니다.
흥인지문은 1398년 (태조7년)에 지은 것을 다시 고종 6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물 1호입니다. 성의 정문을 보호하기 위해 수원화성처럼 성 문 옆으로 튀어나와 성을 공격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옹성이 있는데
둥근 공사가림 철판은 이 옹성을 복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코스는 창의문에서 숙정문 가는길이 가파르기에 흥인지문에서 혜화문 코스로 잡았고 숙정문 구간이 오후 4시까지 입장 가능하므로 하루에 투어를 마치려면 이코스가
맞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껏 지나가면서 오랜 시간 보았지만 가까이서 새롭게 보니 세월의 연륜이 그윽하게 적셔있어
참 아름다운 성이라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치성일지언정 아름다운 속내를 드러낸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사대문(인, 의, 예, 지) 은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이며
사소문 은 혜화문(동북쪽, 동소문), 광희문(동남쪽, 남소문), 소의문(서남쪽, 서소문), 창의문(서북쪽, 북소문)입니다.돈의문과 서소문은 현제는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을 이길 수 없듯 단정하여 범접못할 위엄이 보입니다.
선은 이렇듯 우아하지만 단단한 신념이기도 해서 보기에 좋은듯합니다.
허물어진 화성의 옛 사진이 떠올라 측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성벽을 보게 됩니다.
자세한 안내 지도가 없어 출발부터 헤매기 시작하는데 이 혼란스러운 여정은 계속됩니다.
성곽 밖으로는 성곽 위로 올라갈 수 없어 한참을 걷다 동대문교회 철거터 약간 지난 디자인 센터로 다시 올라갑니다.
디자인 센터 건물 뒤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며칠 전 도성 박물관 관람 시 참 곧고 크다라고 하였는데
오늘 다시 보니 아까시 나무입니다.
서울 성곽은 사적 10호로 조선 태조 5년 20만 명을 동원하여 만들었고
(당시의 인구를 감안하면 대 역사입니다. ) 26년 후 세종 4년에 돌로 쌓고
활 등을 쏠 수 있는 시설 등을 만들었습니다.
낙산공원으로 가는 길 나팔꽃과 죽단화 좀 씀바귀 등의 꽃들이 피었습니다.
비가 너무와 카메라를 들고만 다닐 수 없어 갤럭시노트3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과 같이 섞여 있는데 dslr 카메라의 무게 만만치 않습니다.
전경이 어느곳에서나 아름다운 도성길 이지만 낙산공원 안으로 무심코 따라가면
턱 하고 막혀 있는 성벽의 모습으로 다시 암문까지 돌아 올라가야 합니다.
되돌아 가는 길.
성벽길은 암문 밖으로 나가서 이렇게 이어져 있는데 제법 운치가 있어 금방의 일은 잊지만 끊어진 길로 인하여 나중
전체 길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걷게 되는 구간도 있게 됩니다.
흠...
우리나라의 성벽 돌은 정말 모양이 각각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이룹니다.
- • 성벽
- 1395년(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벽을 처음 축조할 때 산지와 구릉에는 석성으로 쌓았고 평지에는 토성으로 쌓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쳐쌓았다. 1704년(숙종 30년) 훼손된 구간을 정비하는 등 대규모로 수리하였으며, 영조 연간에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을 쌓는 등, 1869년(고종 7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개축과 수리를 통해 보강되고 관리되었다. 이에 구간에 따라 석재 형태와 구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수축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14세기말 태조 때의 성벽으로, 화강암이나 편마암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친 느낌을 준다. 동북면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서북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지역별로 97개 구간으로 축성구역을 나누어 쌓았다. 두 번째 유형인 15세기 초 세종 때의 성벽으로, 아랫부분은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높이를 보강, 여장도 완비하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水門을 2간 더 설치하였다.
세 번째 18세기 초 숙종 때의 성벽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쌓아, 성벽의 기울기가 일정하고 정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성수축의 필요성에 논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다시 쌓고, 남한산성의 강화의 성을 보강하는 등 성역과 함께 진행되었다. 1704년(숙종 30년)에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에 대규모의 도성수축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잘못 보았는가 했는데 약간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것이 제법 모양을 냅니다.
이렇듯 크기가 제각각인 것은 화포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혜화문이 보이는데 11:06분입니다. 성곽은 끊어지고 계단으로 나가게 하고 저 밑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합니다.
헤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지붕건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육축에는 하부를 큰 장대석으로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을
불규칙하게 쌓아올렸으며 위쪽 좌우에 2개의 누조(漏槽 : 홈통)를 돌출시켰다. 그 상부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를 두었다.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한다.
적의 공격에 대하여 막는 역할을 하여 무시무시할 것 같으나 역시나 조선은 모든 산세나 지세도 감안하고 뜰은 이렇게나 단정합니다.
성벽 옆길로 가다 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성벽의 흔적은 희미해지고 주택들이 올라서 있습니다.
우체부에게 물어서 꽃길 있는 쪽으로 직진하면 나온다고 하는데 꽃길이 능소화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학교의 건물도 성벽 위에 있습니다.
길 건너 과학고 우측 언덕입니다.
말바위 안내소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도 암문이 있습니다.
꼬리가 약간 붉은 것이 동고비 같습니다.
와룡 공원 끝부분에서 길은 막히고 우측 성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오르다 성곽을 다시 올라가는 다리를 만나는데 이곳을 올라야 합니다.
숙정문
성곽 외곽으로 많은 밤나무를 만나는데 주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숙정문입니다. 삼청각에서 보면 운치 있게 보입니다.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제 방문하였던 삼청각의 일화당입니다.
혼자 여행하는 일본 여자분이 찍어준 사진입니다.
청운대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갈림길이 있는데 , 일전 방문하였던 곳이라 지나칩니다.
창의문 가는 길은 지루하게 내려갑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가야 할 인왕산 성벽입니다.
창의문 직전 암문이 있습니다. 보통 암문의 위치는 보안을 위하여 지도에도 표시하지 않습니다.
북한산 중성문을 포함하여 13 성문을 여름 10시간 겨울 11시간에 걸쳐 돌 때에도 여러 개의 암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창의문에 도착하였습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 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써,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문을 자하문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에 일하러 나갔던 가난한 사람들이 저녁이면 집으로 가는 이곳을 넘어 살던 동네가 지금의 부암동입니다.
환기 미술과, 지금은 자리를 옮긴 라 카페, 환기 미술과, 서울미술관, 유금 와당 박물관등 카페들이 많이 있습니다.
윤동주 문학관 위로 난 성벽인데 가다 끊어지므로 도로로 해서 한참 올라가면 초소가 나오고
초소 건너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시인의 언덕부터 여기까지가 수방사 관할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2019.10월 현제 모두 철거)
걸어온 북악산(백악산)을 돌아봅니다.
가야 할 인왕산도 멀게 보입니다.
대나물
초소 앞에 휴식 중 잠자리가 날아다니기에 버릇처럼 맨손으로 잡으려 하니 초병이 픽하고 웃는 모습이 보이는데 , 금방 나르는 잠자리 2마리를 잡고는 놓아 주니
초병이 머쓱한지 다른 곳을 봅니다. 잠자리도 자기 나르는 높이와 길이 있고 슬슬 몰면 하늘을 나는 것이지만서도 몰아집니다.
인왕산 정상에 뜻하지 않게 많은 제비가 날아다니는데 그렇게 왔어도 처음 봅니다.
인왕산 정상 삿갓바위 표지석입니다.
군 초소 밖으로 성벽이 둘러져 있는데 외부에서 보면 흰색으로 표시가 나서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대는 제가 임의대로 부르는 군견(군대 있으므로 )이 있는데 어느 때는 보이다가 한동안 안 보이다가 ,
다른 종류로 보이다가 합니다.
범바위. 본인은 아무리 봐도 범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데 이곳과 무악재와 심지어 경복궁까지 범이 어찌나 많았는지
어명까지 떨어졌었습니다.
범바위에서 내려온 인왕산을 돌아봅니다.
인왕산 등정 시작 부분이며 초소에서 끊어진 성벽이며 바깥쪽으로 올라가게 한 길이며 성벽 안의 길은 가파른 계단인데
서로 어느 정도 가다 만나게 됩니다.
초소에서 내려가는 길이며 이후 월암공원- 돈의문 터 - 창덕여중-러시아 대사관- 남대문에 이르는 구간입니다.
그분께서 사시는 곳입니다. 구글 어스를 보면 너무 정확한 위치 등을 알 수 있으련만
초병들은 한사코 찍지 못하게 하며 백악산에서는 카메라 사진까지 조사하는데
사진 지워도 복원할 수 있고요 소리 나지 않는 카메라 어플이 있어서 소용없다고 알려줍니다.
달맞이꽃이 가득합니다. 화강암 바위로 만들어져 상당히 척박한 인왕산이지만 계절별로 개망초와
밀풀, 대나물 꽃, 쑥 부쟁 이등이 가득하게 피었다가 제철을 맞는 다른 꽃들을 위해 자리를 내줍니다.
이곳에서 끊어져 여고 안으로 간간히 있다 숭례문이 나타나는 이 길도 다시 답사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 ※ ※ ※ ※ ※ ※ 2020.10.25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 성곽 외곽길로 답사하기 ※ ※ ※ ※ ※ ※ ※
지금은 사라진 강북 삼성병원 쪽의 돈의문터 안내표지 전광판 입니다.
돈의 박물곤 마을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야 합니다.
서울시 교육청가는 길로 그곳은 상시 무료 주차 가능합니다..
조용한 길입니다.
월암 근린공원과 홍난파 가옥이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표지판을 따라 낯선 연립의 길을 돌아야 합니다
길은 주택가로 이어지는데 그리 길지 않으므로 표지판을 잘 보고 가야 합니다.
성곽 밖으로 가는 길입니다.
흰색의 서양 등골나물이 산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군부대가 맨 좌측에 있고 중앙이 범바위이고 우측이 인왕산 정상입니다 오늘은 성 외곽으로 군부대를 돌아 범바위로 해서 정상에 접근 하는 성 외곽 코스를 잡았습ㄴ다.
여기까지가 돈의문에서 인왕산 입구에 이르는 성곽 외각길입니다.
군경 초소가 있던 인왕산 입구길 입니다.
본격적인 인왕산 등반 성곽 외곽길로 오를때 조용하여 항시 다니는 길이기도 한데
개망초나 달맞이꽃등이 눈부시게 길을 치장하는 곳입니다
쉽사리 아무 때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추억같은 아름다운 푸르름을 오늘 만났습니다.
잠시후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만나지만 직진해 봅니다.
다니던 길의 흔적은 있지만 계단길은 여기서 막히고 왼쪽으로 굿판이 벌어지는 곳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습도가 적어서인지 햇살조차 깔끔합니다.
군부대 레이더가 돌아가는데 한국의 산은 아무리 작아도 세월을 한껏 먹어 부서지는 화강암의 길들이 많은데
이곳도 백운대 처럼 바위가 부서져 흘러 내립니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있습니다.
가파른 길이며 철조망으로 막혀 있습니다.
통제 구역으로 숲을 밟은 길이 보여 가봅니다.
가파른 길이 길고 위험 합니다.
건널까하다 내일 근무로 돌아 섭니다.
정상쪽으로 올라가보면 방화물통 작은것이 2개 있습니다.
군부대 외곽으로 철조망이 둘러쳐 있습니다.
군부대 도착 전 성 내부 길로 들어가 내려 가는 길의 햇살을 받은 이 가을 마지막 싸리의 황금빛 입니다.
아까 인왕산 오른 시발점으로 돈의문 가는 성곽 안 길입니다.
팥배나무 열매가 가을에 맑갏게 익었습니다.
아까 돈의문 터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 ※ ※ ※ ※ ※ ※ 2020.06.04일 놓친 흔적이 있나 다시 찾아 돌아보았는데 역시나 많은 부분을 놓쳐 꺼꾸로 인왕산에서 내려온 길을 되돌아 가봅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상공회의소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는 단정한 정경입니다.
상공회의소를 그렇게 가보았는데 그 담이 성벽길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프라쟈 호델가는 길을 만나는 서소문로를 건너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쪽으로 향 합니다.
정동 제일교회를 지나 정동극장으로 향하면서 돌아보다 툭 끊어진 정동길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 갑니다
이화여고를 돌아 길을 찿다 약간 되돌아 성곽의 일부가 있다는 창덕 여중 안내소까지 도착하고
굳게 닫혀있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되돌아 가다 길을 건너
삼성병원 광화문쪽으로 우측 돈의문 박물관 앞 돈의문 터를 만나게 됩니다.
성곽 안내원의 인솔아래 들어 갈 수 있는데 코로나로 중단된듯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숭례문입니다.
2008년 2월 11일 새벽,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이 불로 무너졌다. 전날 오후 9시께 방화가 시작된 지 5시간 만의 일이다. 중부소방서는 불이 난지 6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화재 초기에 불길을 잡는 듯했다. 이때까지 소방당국은 숭례문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숭례문 지붕 위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붕 위로 피어나던 연기는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10시 40분 불길이 2층 누각으로 번졌다. 연기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불꽃이 누각 바깥으로 새 나오기 시작했다. 20층 높이까지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갖춘 소방차를 비롯해 88대가 총출동했지만 숭례문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뻔히 보고도 끄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은 가연성 물질이 공기 중에 산소를 만나 열에너지를 만들며 급격히 일어나는 산화반응이다. 불을 끄려면 불타는 물체의 온도를 떨어트려 열을 제거하거나 산소 공급을 차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소방당국이 뿌린 물줄기는 불에 직접 닿지 않아 열을 식히지 못했다. 소방당국이 숭례문의 건축구조를 사전에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2층 지붕은 전통 목조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 위쪽부터 살펴보면 기와와 보토(진흙) 층, 석회층, 적심(지붕에 넣은 원목), 개판(널빤지), 서까래(통나무)로 된 6겹 구조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 1961~1963년 숭례문 보수공사를 할 때, 기와 바로 밑에 있는 보토층에 석회 성분을 많이 넣었다고 한다. 진흙에 석회를 섞은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과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불은 나무를 촘촘히 넣은 적심에 붙었고 내부를 따라 활활 타기 시작했다. 밖에서 볼 때 숭례문의 불길이 잡힌 듯했지만 자꾸 연기가 나온 이유는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 낀 적심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물을 지붕에 뿌렸지만 석회 성분이 방수 효과를 내는 바람에 불이 붙은 부위까지 물이 스며들지 못했다.
숭럐문에서 소월로 남산길을 오릅니다
남산길은 어찌나 아름다운지요.
이곳에서 배지를 받고 남산길을 오르는데 표지판이 없어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니 조금의 흔적이 보이고 백범광장에서는 아예 끊어져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공사하는 곳을 바라보고 왼쪽 예전 남산길, 케이블카 내리는 곳 쪽으로 올라야 합니다.
봉수대입니다.
서울의 모든 명소는 대륙인 차지인데 , 이 곳 가지 이렇게 열쇠와 많은 인파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사랑한다는 표현 , 떠나지 말라는 그거 말하고 싶은 거죠?
이 많은 사랑들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성곽은 이어지다 끊어지다 혼동되게 하는데 국립극장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 맞습니다.
성곽은 미군부대 철탑으로 올라가는데 따라가 봅니다.
굳게 닫히니 철망 문이 막아 다시 내려오는데 성이 한 줄로만
축성된 것이 아니고 재성처럼 다른 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이 없어 갈 수 없어 도로를 따라 내려옵니다.
어느 부분에서 만난 지 알 수 없는 배롱나무
이곳부터 잘 살펴야 합니다. 바로 길을 건너 반얀트리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 ※ ※ ※ ※ ※ ※ 이 시점에서는 거꾸로 국립극장에서 봉수대로 재 탐방하는 길입니다. ※ ※ ※ ※ ※
2020.05.14 재 탐방 벌써 6년 가까이 됩니다.
버티고개
중구 신당동 끝과 약수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한남동에서 중구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통틀어서 버티고개, 버터 고개, 버티고개, 번도, 번티〔番峙〕, 부어터고개라 하고, 한자명으로 부어치,벌 아령이라 했으며, 약수동고개,장충단고개라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길이 좁고 무인지경이 되어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라는 농담을 하였다. 옛날에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외치며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번티고개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버터고개,부어치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餠市峴〕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남쪽에는 벌아령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고 하는데,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풍 시장 위쪽에 있는 유명한 버티고개 약수는 약수동 동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지하철 6호선에는 버티고개의 이름을 딴 ‘버티고개역’이 있다.
반얀에서 국립극장 쪽으로 길을 건너 사진의 좌측 길이 남산 정상으로 운행하는 버스가 가는 길이며 성곽길 일부 구간 맞습니다.
화단을 장식한 크리산세멈 멀티콜 옐로
조금 오르면 화장실과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길입니다.
솔숲이 장관입니다.
자동차 길로 걷다 보면 성곽길이 나오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반얀에서 이곳까지 끊어진 성곽이 어디 있나 살펴보면
조금 전 지나쳤던 입구 없는 휴식처 이곳입니다. 이곳을 들어가면
핑크 케스케이드와
이전에는 이곳을 탐방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자연산이 없는 맥문동이 심어져 있고
성곽을 비추는 조명 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티고개로 인하여 잘라진 절벽이 너무 높아 위험하여 막은 것 같습니다.
진입로가 없는 엄청난 비밀의 정원입니다.
다시 성곽을 오르면 벚나무를 잘라놓았습니다. 나무는 바람이 불면 성곽을 치기 때문에 아무리 굵어도 베어야 합니다.
때죽나무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찔레도
국수나무 꽃은 온 남산을 덮었습니다.
성벽이 물결 흐르듯 휘감아 옵니다.
중간 전망대에 올라 뒤를 보면 국립극장 신라호텔 반얀 트리가 보입니다.
이 길이 봉수대 가는 길이며
이 나무계단 밑으로 희미한 길을 따라가야 하며 중간에 길이 끊어지다 험한 곳에서 군부대의 철책담이 보이며 막힙니다
이곳은 병꽃이 가득합니다.
표지석이 나오고 길은 더 위험해져 가는 듯합니다.
나무 밑으로 숙이며 지나가기도 하다가
군대 철장담이 보이고 길이 끊어집니다. (오늘은 이곳까지)
며칠 후 연이어 봉수대 쪽으로 향합니다.
드디어 성벽이 보이고
세월을 보냈을법한, 마을과 서울을 지켜주는 수준까지 된 느티나무라 그냥 둔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의 보현봉은 이름 없는 봉이고 그 우측이 문수봉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출입금지 지역인 , 규봉이라고 불렸던 보현봉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네요
인증 점프샷
성곽이 끊어진 부대입니다.
작약, 삼색조팝
이렇게 근처까지는 보여주나 성벽길은 곧 끊어집니다.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고
이 길이 버스가 올랐던 길이고 성벽길은 거의 밑에서 급하게 계단으로 올랐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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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다 광장 동그란 분수가 보이면 좌측 골프 클럽 쪽 진행하다 작은 표지판을 보고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계속 걸으면 호텔 신라 담벼락을 끼고 가는 길이 되며 조명도 없어 컴컴합니다.
성벽의 끝입니다.
장충체육관이 리모델링하고 있고 지나온 남산 탑이 보입니다.
2019.10.01 보완
지나고 보니 벌써 5년 전 일이 되었네요. 당시 끊어진 성벽을 혹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잊지 못하다가
업무가 취소되어 돌아가다 회사 한 정거장 거리의 광희문 안내가 당시의 미흡한 부분을 더듬게 하여 내려 찾아봅니다.
광희문입니다. 오른쪽은 카페였는데 문을 닫고 작은 길 위로 카페와 작업실이 있으며
다 와서 돌아보면 여기까지만 성벽이 있습니다
혹시 성벽의 돌을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을까 길을 횡으로 걷다 성벽이 있었을 법한 주택의 능선을 걸어보지만
흔적 조차 없다가 신라호텔 좌측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더운 날입니다.
밖으로 한참을 걷다 암문을 통해 신라 호텔로 들어가 성벽을 걷는데
가꾸지 않은 깊은 숲이 있습니다.
호텔 신라가 뒤로 보일 즈음 돌아보면 북악산이 보입니다
가깝지만 여러 이유로 일 년에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좌측의 숲은 미국 자리공 등 잡초가 무섭게 우거져 있어 들어갈 엄두도 못 내는 모습인데
반얀트리 호텔 마당에 들어게됩니다.
조선호텔은 환구단을 잘라버렸지만 그래도 이곳은 어느 정도 보관되어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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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DDP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이간수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온통 대륙인 차지이며 10시 가까운 시간인데도 별에서 온 그대 관람도 가능합니다.
최초 온 곳으로 돌아오자 오후 9시 21분이니 총 11시간 21분 걸은 셈입니다. 황홀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겨루어 보지도 않고 주었습니다.
숭례문에서 받은 배지인데 , 투어는 동대문 관할이므로
관리소 10M 정도 떨어진 외벽에 비를 맞고 있으며
배지는 관리소에서 줍니다.
스탬프 도장은 삼성병원은 포졸인데 이곳은 맵시 있는 처자의 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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