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이야기 -/휴식이 있는 공원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klcyoh 2023. 2. 1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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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5

사적 제195호

1446년(세종 4대), 1469년(효종17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왕대리)

입구 우측 제법 커다란 백송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릉이 주는 편안함은 넓은 공간과 우람하거나 어여뿐 소나무들 때문인것 같은데

걷는 동안 그 울창함과 시원함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사진은 볼품이 없지만 현장에서는 늘씬한 적송이 주는

장쾌한 시원함이 햇살아래 가득합니다.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죽자 광주(廣州) 서강(西岡)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이 죽자 합장하였다.

이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치장조(治葬條)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 가운데 영저(靈杵: 공이)·영탁(靈鐸: 방울)·지초문양(芝草文樣)을 빼고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만을 새겨 조선병석문(朝鮮屛石文)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은 5개에서 4개로 줄였고,

기타 양식상 바꾸어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다시 옮기자는 의논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능제는 세조가 죽은 뒤부터 크게 바뀌어 병석과 석실제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하여

합장하고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표시하였을 뿐

단릉과 마찬가지로 하였다.

여주로 영릉을 옮길 때 천장도감(遷葬都監)에서 석물을 함께 옮기자고 하였으나

왕명에 의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 1973년에 석물들을 발굴하여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혼유석, 장명등(長明燈), 2기(基)의 무관석과 문관석, 4기의 석수, 7기의 망주석과

구 영릉터에 세웠던 세종대왕신도비가 그것이다.-

왕릉이 옮겨질때 석물을 그자리에 묻었다는 설명을 들은적이 있는데 

이때 시작되어 확정된것 같습니다. 

멀리 무인석(장군석)이 보입니다. 보통은 칼과 어깨 등에 도깨비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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