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창작글

어린 시절의 영화 이야기

klcyoh 2021. 10. 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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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이야기 

지난날의 나를 사는 자아는 스스로에게는 충실 하자고 했지만

지금 와 돌아보면 미숙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어 걸어 다니고 말을 할까 궁금해지며

살면서 어찌 억울한 경험이  없었겠냐만은 그 상처조차도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게 해주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도 드는데  

책임져야 할 부분을 미숙한 시기로 치부하며 위로를 얻고자 하는지도 모르는데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거리는건 쪽 팔리다는 말인데

연일 36도 넘는 폭염으로 오늘 뜨거운거 주의보가 내려지고 있다. 

 

저녁 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툭하면 초등학교 1학년인 내 손을 잡고 흑석동 극장을  다녔는데 

옆방에 사는 처녀와 바람이 난 신성일이 어딘가 다녀와서 처녀를 찾으니 

그녀는 해변에 아빠 안녕이라는 글을 돌로 만들고 차가운 몸이 되어 있는데 

뭘 안다고 어찌나 어린 나의 눈물을 짜내던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데 

당시 영화는 상영 중 검은 화면만 나오거나 한동안 끊어지다 소리 지르면 다시 상영되곤 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다른건 몰라도 영화가 끝나고 퇴장 시간이되면 

 이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켜 불을 확하고 켜서 사나이 자존심을 두번 죽이곤 했다. 

동네 공터에 가끔 오는 서커스는 위가 넓은 대나무 통 안에 오토바이들이 3대 정도 돌아가면서 

높이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는데 점차 공터들이 없어지고 극장에 가기 시작하면서 

맨바닥에 앉는 것이 싫어서 인지 멀어져 갔다. 

애 엄마는 생애 첫 영화가 금촌에 나가서 1인 2역을 하는

임예진이 나오는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보았다고 하는데

임예진이 2인분 역활을 하느라 한명분은

거친 목소리를 내곤하여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에 사나이 `를보고는 아이들 사이에 그 노래를 힘차게 부르던

기억이 얼마나 부르고 다녔는지 지금도 가사까지 떠오르며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인가 올리비아 핫세를 보고는 반하여 그녀만 나오는 영화를 쫓아다녔고

저렴한 가격에 2편을 상여하는 봉래 극장이나 대흥동의 극장을  다니다 

간혹 그래도 중급의 남영동 금성 극장을 다니기도 했다

 

첫 월급을 타서 여성 잡지책을 구입하고 단성사나 피카드리를 다녔는데 

당시는 제목이나 극장 간판을 보고 고르던 시기로 사상 최대 작전이라는

제목만 보고 들어갔다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을 척결하러 용병을 보냈다가

신생 권력과 양해가 되어 고용한 용병들을 버렸는데

그 용병 중 한 명이 복수를  하는 설정에  실망한 적이 있는데 

나쁜 영화는 없고 그걸 보는 바보만 있는데 우주선이 있다고 믿는

영화를 2시간 가량보는데 

결국 마지막에 우주선 처럼  생긴 식당을 가지고 노는 영화 이기도 했다. 

그러다 3류 극자에서 2편짜리 상영에 그게 다이하드 1편이고

다른 한편이 스타쉽 트루퍼스처럼  뛰어난 조합을 흐뭇하게 만나기도 했다. 

 

영활을 보며 현실의 시름을 잊기도 하고

그들의 영화 가운데 보이는 도시와 자연의  멋진 풍경을 접하고 

그들이 사는 주택의  뛰어난 인테리어를 보며 부러움에 가득 차며 

이내 열기가 가득한 현실에서 돌아가는 단단한 금성 선풍기 앞에 앉아야 했다. 

 

서부 영화 죤 웨인 에 반하다가 매그넘 권총을 가진 크린스트 이우스트의

이것이 법이다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율부리너의 반짝이는 까까 머리도 ,

무숙자에서 단순한 권총 쏘는 것에 싫증이 나고

기관단총이 나오고 이것도 비행기에서 폭격하는 영화가 나오면서 

어지간한 총기는 총처럼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시기는 누구도 홍콩 영화 광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이소룡 , 외팔이 시리즈  , 마담 시리즈

영웅본색에서  취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고 누구든 발차기와 쌍절곤을 연습하다

자기 머리통을 치기도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뉴스에서 박노식이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를 찍으며 

비싼 차를 파괴하는 액션신을 찍은 것이 뉴스에도 나왔다기에 보았는데

감흥이 별로 였고 

서울에서 매진되었다고 하여  안양 가서 본 고래 사냥은 짜증이 확 나기도 했다 

결혼해서도 영화 구경은 우리 삶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우연하게 서대문 극장에서 본 유덕화에 반해 그가 나온 영화를 쫓아 다녔는데 당시의 우리에게는  아이돌인 셈이었다.

 

2.공포영화

단성사에서 나를 버리고 간 지금의 왕비가 기억나는데 

일부러 그래봤다는데 그 순진한 여자애가 그랬다고

믿을수 없을 만큼 홀로 남은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공포 영화를 보는듯 아직도 억울하고 무섭기조차하다 

 

공포 영화 쪽에서는 레젼드 월하의 공동묘지로 시작해서 드라큐라 영화에서

13일의 금요일에서 공포 영화가

도를 더하다니 드디어 이태리 영화에서 배를 뚫고

뒤의 장면을 보여 주는 영화가 나왔었다.  

백설공주에  길이 들여져 한국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진 후

한국 영화 안 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는데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탄성을 내며 

새로운 경지를  에어리언과 경계를 다투기 시작했다. 

 

결혼 후도, 회사일로 지쳐가도  한 달에 3번은 극장과 미술관을 다니던 시기로 

대한극장 포인트 10만 점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던 시기  이기도 했는데 

그러다 갑자기 시작한 외국 생활 시절에는 느린 인터넷 사정으로

아침 출근 시 영화를 다운 시작하면 

퇴근 무렵 다운이 완료되곤 했는데 퇴근 후 저녁에 운동 후

이틀에 한편을 보면서 몇 년을

지내고 했는데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에서 영화를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참을인자 3개면 살인도 면한다며 주인공을 참게 하더니 폭팔하는 액션신은 고전이고 

점차 권선 징악이 아닌 멋진 악당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멋진 액션신이나 성공신도 없는 나는 언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요트를 타고 배에서 다이빙을 해보나 앞날을 생각하며 궁금해보기도 하다가

그래 나도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고 

친구는  외로울 때 진정한 위로가 되어 좋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인생을 공유하는 , 그 저녁에 남산길을 왜 걸었는데? 

" 그냥" 아 ~ 다른 말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냥"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납득이 가는 설명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내 친구 혜영이(처음에는 여자이름 같아 별로이고 게임 할때

같은 편이면 재수 없다 생각도 들었지만) 와 영구를 생각하면 

우린 다 그렇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린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내가 팔을 벌리고 서있으면

지구의 자전 속도를  내 가슴에 안고 시속 1,667km 로 우주를 안고 있는데 

억지로 감사를 쥐어짜지 말고 좀 더 즐거우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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