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08
한적함과 드젋은 공간과 수령이 많은 나무들과 나무들 그리고 어울어진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수십년간 북한산을 다니면서 스쳐 지나간 공간을 이제야 찿아 보았습니다.
성균관의 정문은 공부자탄강일에만 개방된다. 문들 들어서 보면 한여름의 한적함이 가득하고
우람한 나무의 정경에 감탄하게 됩니다
마당은 집비둘기가 모래 흙에 몸을 비비며 사람이 아도 움직이지 않고 즐깁니다.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던 서재이며 마루는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는데
넓지도 굵지도 않지만 궁궐외에서 저정도의 나무를 사용하는 건축물도 그리 흔한것은 아닙니다.
나무 한그루만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풍경이됩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던곳 명륜당.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 공간이다.
1398년(태조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일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 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튓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종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사을 보관하는 장소 였는데 ,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년 (중종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맞배지붕은 깔끔하고 간결하면서도 그로인해 단정하고 굳은 힘이 보이는게 장점입니다.
향관청으로 들어가 봅니다. 향관청은 원래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곳이었으나 ,
주로 제사 업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사무실 및 공관 역할을 하였다 향관청 좌우에 있는
동월랑과 서울랑은 성균관의 감사를 담당하는 감찰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으로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맞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이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까부터 전체 조화를 깨는 철탑에 자꾸 눈이 가는데 ,철탑보고 찿아오는 사람 없는걸로 아는데
주변 경관에 어울리게 문양있는 한옥 굴뚝과 같은 모습으로 어울리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서재의 앞 뜨락 모습니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후 성종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대와 그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성균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으나,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200명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四學) 생도나 문음자제(門蔭子第)들이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고 승보시 출신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구별했다.
그러나 이들 하재생도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에 달하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과과정은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의 제술로 이루어졌으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1466년(세조 12)에는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으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발된 이들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균관의 이러한 성격은 조선 후기에 유교 학풍이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 심성 수양과 의리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서원을 통해 그러한 학풍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성균관 교육의 부진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이 여전히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했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음백과)
주차는 입구 국제관에 하면 되는데 , 입구 잘 기억해두어야 건물에서 혼동되지 않는다.
길 잃고 방황하다가 발견한 작품. 국제관 바로앞 600주년 기념관 지하는 볼 만한 전시가 가득한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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