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딸 -/- 정현이의 이야기

페르난도 보테르

klcyoh 2009. 8. 3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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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8월30일

 나름대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관람하기로 한것은 이즈음 보기 시작한

" 무서운 그림"이라는 책에서 그림이 품은 작가의 시대, 배경, 환경,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등을 읽고 나도 이처럼 완벽하게 개인적으로 느끼고 해석하기 위하여서 였지만

언듯 방송에서 본 통통한 즐거움을 연상하고  4관까지의 전시관을 둘러보는 중에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실제 그림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어두워 졌다.

 

 유일하게 웃는 그림에 다가갔지만 이도 입술은 생기 없이 단단한 일상의 모습가운데

하나였다.  정현이와 보고 난 후의 감상을 서로 나눈 결과 색이 예쁘고

어릴 때 무척 가난했던것 같아 내면에 각인된 배고픔을 그림으로 표출하기 시작한것이

아닌가 하였고 거의 모든 풍경의 창밖으로는 교회 첨탑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보테로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상영하는 곳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보자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는

나와 다른 관점에서 강요된 감상이거나 내가 느낀 것과는 달랐다.

그의 작품에 뽀쪽한것은 금기인듯 포크와 소의 뿔조차 그림의 둥근 탁자 모서리처럼

각이 둔하다.

" 아빠 작가가 살아 있어서그래요" 정현이가 마지막에 한 말에 웃었다.

가난과 폭력 죽음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도저히 알수 없었던

생명의 경외가 눈을 틔우면서 남미의 색체가 더하여 졌는지 모르겠다.

 

정현엄마 :  작가는 자기 주장이 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자기 고집이 있는데, 이 각박한 세상에

이 그림들은 오히려 풍족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방긋 웃으면 웃는줄 알지만 웃는다고

다 웃는것이 아니며 (내면을 주시하는 시각을 말하는것같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남이 좋다고 해야만 좋은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아직은 작가가 혼신을 다하여 그린 그림을 통하여 그의 영혼을 조심스럽게 보는

훈련이 부족한것 인지 모른다.

 

약력은  다음의 동초미술이라는곳에서 발췌하였다.

 

Fernando Botero_약력

1932
페르난도 보테로 앵글로는 4월19일 안데스 산에 위치한 안티오키아주의 상업중심지인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 모두 콜롬비아 출신으로 그의 부친 데이비드 보테로는 조랑말로 행상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행상이었고

페르난도가 4세 되던 해 사망했다. 그에게는 데이비드와 로드리고,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1938-1949
보테로는 메데인의 소학교를 다니며 장학금을 받아 예수회 중학교에서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숙부의 권유로 12세 때 메데인의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니게 되나

정작 그는 투우사를 그리는 데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로인해 보테로의 초창기

그림들은 주로 투우장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첫 번째로 수상한 수채화 작품은 투우사작품 이었다.
1948년에 보테로의 작품이 메데인의 미술연구소에서 개최되었던 그룹전에 출품 된다,

16세가 되던 해에 메데인의 주요 일간지인 ‘엘 콜롬비아노'의 일요일판에 삽화를

그려 개제하기 시작한다.

멕시코의 벽화가 들이자 그 당시 보테로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크레멘테 오로스코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어릴적 부터 교회나 수도원의 식민지시대의 콜롬비아 바로크 미술양식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콜롬비아에선 자유당과 보수파 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이 시기에 페드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블로 네루다, 미겔 아스투리아스와 같은

 지식인들이 발굴되었다.

보테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인 비평가 줄리오 페이로가 쓴

현대 미술 역사 중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다.

‘엘 콜롬비아노’지에 나체 대생을 게제해 교장에게 훈계를 받으며

‘피카소와 예술에 있어서 비국교도’라는 논문으로

퇴교처분을 받는다.

 

 

 1950-1952
마리라 근교에 위치한 리세오산호세에 입학한다.

신문에 삽화를 개제하며 등록금을 벌어 1950년 학교를 마친다.

학교를 떠난 후 2달 동안 스페인 극단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 한다.

 1952
1952년 1월, 수도 보고타로 상경하여 아방가르드의 유파에 합류한다.

멤버 중에는 작가인 호르세 살라메아와 가르시아 로르카의 친구인 전 멕시코 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보테로를 비롯한 다른 예술가들은 그 당시 미술흐름을 비롯해 추상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한다.
5월경 캐러비안 해안에서 지내며 만든 작품들을 레오마티즈 화랑에서 선보인다.

세달 후 ‘On the Coast'라는 작품으로 콜롬비아 살롱에서 2등을 수상한다.

상금 7,000페소를 받은 보테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1952년 8월에 피카소가 그의 어린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몇일 후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겨 아카데미아 산 마르코에 입학한다.

그는 프라도 미술관의 대작들을 공부하며 벨라스케즈나 고야와 같은 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그 당시 보테로는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대작들의 모사 작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회상하기를 “그 당시 미술학도들은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반면에 나에게는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일 순위였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보테로는 파리로 떠나 루브르에서 대작들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다.

 1953
여름을 파리에서 보낸 후 이태리의 플로랜스로 거처를 옮긴 보테로는

 아카데마아 산 마르코에 입학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태시즘 화법이 유행하여 보테로 역시 죠트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르네상스 화가들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후 곧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법인 프레스코화의 기법에 매료되어

직접 유화 작품을 시도한다.

오토바이로 북이탈리아의 시에나, 베네치아, 베니스와 같은 이탈리아

예술문화의 중심지를 여행 한다.

 1954
1954년 봄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파블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마사치오와 같은

르네상스 페인팅 작가들의 전시와 프레스코화를 보기 위해 떠난다.

특히 이당시 보테로의 작품 중 ‘Departure'의 말들은 우첼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5
프로랜스에서 지내는 동안 만든 20점의 작품들이 전시 된다.

전시는 악평으로 끝나고 생활을 위해 2개월간 잡지 레이아웃을 그리며 생활한다.

12월에 글로리아 세아와 결혼한다.

 1956
보테로 부부는 멕시코로 이사하여 첫 번째 아들을 낳는다. ‘Still Life with Mandorin'을 그리고 있던 당시

보테로만의 특징이 되는 과장되게 부풀려진 형태의 특징을 잡게 된다.

 

 

1957
4월경 판 아메리칸 유니온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을 위해 워싱턴으로 간다.

그곳에서 후에 보테로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 줄 타니아 그레스를 만나게 된다.

10월에 작품 ‘Counterpoint'로 콜롬비아 살롱의 2등상을 수상한다.

 

 1958
보고타의 국립미술대학을 수학하며 그의 명성은 콜롬비아의 중요한 젊은 예술가로 서서히 알려진다.
만테냐의 프레스코화를 재해석한 ‘Camera delgli Sposi'를 제 11회 콜롬비아 살롱에 출품하지만 심사위원회에 의해

거부된다. 하지만 보고타의 미술 비평가들과 언론의 항의로 재심사가 이루어져 결국 수상하게 된다.
10월에 미국 워싱턴의 그레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지며

거의 모든 작품이 팔리는 결과를 낳는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 뉴욕의 구겐하임 국제 전시회에 참가 한다.

 

1959
제 12회 콜롬비아 살롱에서 보테로는 'The Apotheosis of Ramon Moyos'를 출품한다.

벨라스케즈를 연구하고 ‘Nino de Vallecas'를 통해 보테로 특유의 볼륨을 가진 양식과

뉴욕의 추상주의 필치의 조화를 보여준다.

 

1960
2달간 보테로는 메데인의 중앙은행의 위임 하에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였다.

콜롬비아 출신인 미술비평가 마타 트라다를 포함한 위원회는

그를 멕시코 비엔날레의 콜롬비아 대표 작가로 선출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보테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반감을 낳기도 했다.
10월에 보테로는 그레스 갤러리에서의 그의 두 번째 전시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다.

그는 당시 추상 표현주위가 유행하던 뉴욕으로 이동한다.

그레스 갤러리가 문을 닫음으로서 그의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된다.

그의 부인 글로리아 세아와 결별한다.

1961
보고타의 El Callejan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뉴욕근대미술관은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의 추천으로 보테로의 첫 번째 버전

 ‘Mona Lisa, Age 12'를 구입한다.

 

1964
세실리아 산브리노와 결혼한다.

‘Apples'가 보고타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인터 콜(intercol) 주최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다.

 

1965
‘The Pinzon Family'의 완성으로 보테로의 특징적인 양식이 성숙된다.

실질적인 형식의 그의 초기 작품은 점차 정교하고 장식적인 색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그는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가인 피터 폴 루벤스에 대해 연구하며 네 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1966
1월 보테로의 개인전이 바덴바덴의 주립미술관에서 열리고 독일의 다른 도시들을 순회한다.

전시는 후에 뮌헨의 부흐홀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9월에는 하노버의 부르스버그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선별된 몇몇 작품이 더 선보인다.

밀워키예술센터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이 열리며

타임지에 극찬하는 기사가 실린다.

 

1967
보테로는 이태리와 독일에 머물며 그곳의 미술양식을 공부한다.

시리즈 목탄화인'Dureroboteros' 을 완성한다.
독일을 방문한 후에 보테로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에 매료된다.

그 해 프랑스 인상파인 에드아르드 마네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보나르의 목욕하는 여인을 재해석한 시리즈를 완성한다.

보테로가 말하기를 “모든 것들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그 모든 것에 라틴 아메라카의 정신이 스며있기를 바란다.”

  

 

1969
3월에 선별된 몇몇의 작품들과 큰 포맷의 목탄 스케치들이 미대륙 관계를 위한 뉴욕센터에서 전시된다.

9월에는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가 열린다.

 

1970-1971
80점의 유화작품이 바덴바덴,베를린,뒤셀도르프,함부르크,비레페르크등 독일 각 도시의

 주요 미술관을 순회한다.

파리, 보고타, 뉴욕에서 생활하며 같은 해 조각 작업을 시작한다.

 

1972
2월에 뉴욕의 말보로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를 연다.

같은 해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에서 전시회를 열며 독일박물관의 주최 하에 전시회를 준비한다.

파리의 작업실을 옮기며 보고타에 북쪽 카히카에 여름별장을 마련하여 현재까지 그곳에서 때때로 시간을 보낸다.

 

1973
뉴욕을 떠나 파리에서의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첫 번째 조각 작품을 완성한다.

 

1974
보고타에서 1948년부터 1972년까지 그의 작품들을 모아 회고전을 연다.

자동차 사고로 4살인 둘째아들 페드로를 잃는다.

이 비극적인 사고로 이후의 보테로의 회화 및 조각에 있어 아들상 제작의 동기가 된다.

 

1975
세실리아 산브라노와 이혼한다.

 

1976
보테로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앙드레스 베로 훈장을 받는다.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는 보테로의 큰 포맷의 수채화와 스케치 전시를 연다.

같은 해 보테로는 조각에 전념하기 시작해 토루소와 고양이,

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재를 이용한 25점의 조각을

제작한다.
그리스인 조각가인 소피아 바리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1977
콜롬비아 미술에 대한 봉사가 인정 되 안티오키아 주정부로부터 보야카 십자훈장이 증여된다.

메데인의 제아미술관이 ‘페드로보테로의 공간’이라는 명칭을 가진 새로운 방을

개설하여 보테로가 아들에게 바친

열 여섯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조각을 발표한다

 1978
파리의 아뜰리에를 과거 아카데미 쥴리앙이 있었던 드래곤 거리로 옮겨

다시 회화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1979-1981
벨기에,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에서의 순회전이 이루어진다.

1979년 미국에서의 첫 번째 회고전이 워싱턴의 허션조각미술관에서 열린다.

바젤의 바이엘러 갤러리에서 수채화 및 조각 작품이 선보인다.

1980
엘티엠포에 삽화와 함께 짧은 글을 개제하기도 한다.

 

1981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처음으로 회고전이 열린다. 로마의

Ⅱ Gavviano gallery에서 수채화 및 드로잉이 선보인다.

1983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Dance in Columbia'를 구입한다.

월간지 베니티페어 첫 호에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Chronicle of a Death Foretold'을

위한 삽화를 그려 넣는다.

투스카니의 작은 마을에 조각실을 마련해 놓고 후에 매년 조각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1984
메데인의 안티오키아미술관에 페르난도 보테로의 조각 공간 상설을 위해 작품을 기증한다.

보테로는 같은 시기에 보고타의 국립 박물관에 18점의 회화를 기증한다.

투우를 주제로 2년에 걸친 회화 연작을 시작한다.

보테로는 스페인식 투우라는 주제에 관한 독보적인 작가가 되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투우를 보았을때 자동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떠올리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985
뉴욕의 말보로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25점의 다양한 투우사의 유채화들이 선보인다.

같은 해 푸에르토 리코의 폰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이 선보인다.

 

1986
1월 카라카스에서 최근 4년간의 작품들을 모은 소묘 전을 시작으로 뮌헨, 그레멘,

 프랑크푸르트, 마드리드,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의 회고전이 이어진다.

 

1987
12월 밀라노의 스포르체크성에서 투우를 주제로 한 유화, 수채화, 소묘 등의 86점의 개인전이 열린다.

 

1988
‘La Corrida'가 나폴리의 오보성, 파레르모의 알베르고 델 포레베를 순회한다.

여름에는 벨기에의 카지오 쿠녹케에서 회고전을 가진다.

 

1989
‘La Corrida'가 베네주엘라의 코로미술관, 카라카스의 현대미술관, 멕시코의

루피노타마요미술관을 순회한다.

로스엔젤레스 미술 박람회에 조각을 출품한다.

 

1990
스위스의 마르티니에서 피에르 지아나다 재단이 유화, 수채화, 소묘, 조각 회고전을 개최한다.

뉴욕의 말보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다.

 

1991-1992
로마의 에스포지오니 궁전, 모테카를로의 카지노,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조각 전시를 한다.

보테로는 샹젤리제에 작품을 전시한 최초의 외국인 이기도 했다.

 

1993
뉴욕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미술단의 개최로 보테로의 재표 조각 16점이 파크 애비뉴에 설치된다.

'Maternity', 'Woman with Mirror', 'Cat', 'Bird', 'Reclining Venus'과 같은 작품들이 뉴욕의 가장 유명한 거리인

파크 애비뉴에 설치되고 센트럴파크에 'Adam and Eve'가 전시되었다.

 

1994
봄, 여름동안 시카고의 미시간 애비뉴에 ‘Botero in Chicago'라는 제목으로 조각전시가 열린다.

동시에 마드리드시에서 주최한 옥외 대형 조각전이 파세오 데 레코르토스에서 개최된다.

같은 해 보테로는 보고타에 납치될 뻔하다 간신히 탈출한다.

 

1995
메데인에서의 폭탄 폭발 사고로 조각품 ‘Bird'가 부셔진다.

이 사고로 23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메데인은 약물거래의가 빈번히 일어나며 테러리스트들의 내분의 중심지에 이르게 된다.

보테로는 그의 비둘기 조각을 부셔진 작품 ’Bird' 옆에 배치한다.

이로서 “문화, 노력, 그리도 평화”를 외치며 약물과 폭력으로부터 그의 조국이 한걸음 나아가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1996-1997
보테로의 조각들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과 칠레의 산티에고등지에서 전시된다.

1998
몬테비데오, 몬트레이, 멕시코등의 중남미를 도는 대규모의 순회전을 가진다.

 1999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초청을 받아 시뇨리아 광장에서 30점의 기념비적인 조각품들을 전시한다.

 그 외 작은 조각들이나 유화작품들은 베키오 궁전에 배치된다. 그의 작품은 첼리니,

지암볼로냐, 미켈란젤로와 같은 대가의 작품 옆에 설치된다.
2000
보테로는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메데인에 위치한 두 곳의 미물관에 다량의 그의 작품들을 기증한다.

그는 어릴 적을 회상하며 콜롬비아 미물관에 대가들의 원작대신 흑백의 모조 작 들을

관람 했던 일을 기억하며

기증을 결심한다.

콜렉션에는 조각,회화를 포함한 보테로 자신의 작품 200여점 이상과 피카소,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드가,

투르즈로트렉, 마티즈, 샤갈, 미로, 클림트, 달리, 헨리무어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도

100점이상 기증되었다.

 

2001
멕시코시티에서 ‘50Aaos de Vida Artistica'라는 전시 제목으로 보테로의 50년

미술인생을 돌아보는 전시를 기획 한다.

같은 해 뉴욕 말보로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대형 봄 전시를 준비한다.

2001년 가을 보테로는 스톡홀름의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중요 작 70점을 전시한다.

 2002
스톡홀름미술관에서의 전시를 2002년 1월 13일 까지 이어간다. 그 후 전시는 코펜하겐의

아르켄 미술관으로 옮겨간다.

2003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박물관에서 유화, 파스텔, 조각등 다수의 작품이 전시된다.

베니스에서 그랜드운하를 따라 조각 작품이 전시된다. 파리의 뮤제 마욜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2004
보테로는 이라크의 ‘아부그랩‘ 감옥에서의 죄수들에 대한 대우에 관한 뉴스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시리즈의 작업을

시작한다. 회고전이 싱가폴 미술관에서 열린다.

 2005
로마의 베니치아 궁전에서 ‘아부그랩‘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인다.

 2006
독일의 슈베비쉬할에 위치한 쿤스트할레뷔르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콜롬비아에 머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보테로는 파리, 뉴욕, 몬테카를로,

 피에트라산타에 거주지를 마련한다.

 2007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국제아트서비스의 주최로 미국 순회전을 가진다.

전시는 퀘백의 보자르 미술관에서 시작하여 2007년 1월27일부터 2011년 12월6일 까지 9곳의 미국 주요 게최 예정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밀라노 팔라조 궁전에서 전시가 열린다.

 

  ※ 특별 찬조 출연 북치는 외국인

일전 모습에 감탄하였던 대감이 (예전 수문 교대식의 최종 감찰관) 있어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한다. 그리고  북치는분 정말 힘이 넘치게 온 몸을 돌리면서 북을 치신다.

 궁은 연인이 걷기에 아름다운 장소이다. 우리는 이런 궁을 많이 가진것이 기쁘다.

 우측의 미술관은 휴무에 들어갔다.  미술에 관심이 생기면 유료도 아깝지 않을터인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

 덕수궁 입장료는 천원이므로 관람하기 위하여서는 1만원이 지불된다.

 

  

 

 정현이 훨 아름답다.

 

 

 

 가이드가  예전 자료를 비교해주면서 이 소나무들은 나중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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