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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klcyoh 2015. 8. 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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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8


종    목 : 사적  제118호  
명    칭 : 진주성(晋州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173,036㎡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 진주시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때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城內洞)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

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진주성의 정문격인 공북문이다.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晉州城圖)에 나오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2002년 복원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지정번호   경남 문화재 자료 제8호
소재지      진주시 본성동
지정일자   1983년 7월 20일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 남쪽 석벽 위에 우뚝하여, 웅장한 위풍은 진주성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일명 장원루(壯元樓) 또는 남장대(南將臺) 라고도 한다.  고려조 고종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1190 - 1266)가 창건하고, 충숙왕9년(1322) 목사 안진(安震: ? - 1360)이 재건하였다. 우왕5년(1379)에는 해구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조선조 태종13년(1413)에 목사 권충(權衷)이 중건하였고, 성종22년(1491)에는 목사 경임(慶 )이, 선조16년(1583)에는 목사 신점(申點)이 중수하였다. 선조26년(1593)에는 왜적의 침략으로,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또 불탄 것을, 광해군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하였다.
경종4년(1724)에는 병사 이태망(李太望)이 중수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중건하였다. 하륜(河崙: 1347 - 1416)의 「촉석루기」를 비롯, 많은 시인묵객의 시서화가 오늘에전한다.


































다뉴세문경



북암문옆에 북장대(北將臺)다.

북장대는 임진왜란때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후 여러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북장대는 군사 건물 중에서 조선조 중엽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 건물의 모범이 되었다. 북장대는 내성(內成)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 성내와 외성(外成)에 포진(布陣)한 성병(城兵)까지도 지휘할 수 있다. 그래서  편액(扁額)을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서암문앞에 창렬사(彰烈祠)다.

이 사당(祠堂)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선조(宣祖) 40년(1607)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후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을 모신 충민사가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阮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지금 충무공(忠武公)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위 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忠淸兵使 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慶尙右兵使 崔慶會)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왜 하필이면 나야........

김시민장군 동상이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 안동. 자 면오(勉吾). 시호 충무(忠武). 목천(木川)출생. 1578년(선조11)무과에 급제. 훈련원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91년(선조24) 진주판관이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泗川). 고성(固城).진해(鎭海)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였으니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인 진주성대첩이다.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37) 선무공신2등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진주의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통영에서 서울까지 10시간이 지났슴에도 아이스 박스의 얼음도 녹지 않았고 다금바리보다는 손바닥 하나만한 칼돔의 육질이 졸깃하고 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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