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5
고가의 외제차가 거리에 가득하고 좁은 골목길조차 발리 파킹이 아니면 주차하기도 힘든곳에 호젓하기도 하고
고즈넉하기도 한 너른 공원이다.
공원 입구 우측의 도산 기념관은 월~금요칠까지 10시부터 4시까지이고 토요일은 10시 부터 2시 일요일은 휴관이다.
공원은 유난히 산비둘기들이 많다.
독립운동가로서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흥국(興國)이다.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읜 후로는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무렵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몇 살 위의 필대은(畢大殷)과 국내외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즉,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만 5,000달러를 지원받아 프랑스 조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 방략을 작성하는 한편,
대외선전 및 문화사업에도 착수하여 영자신문인 〈차이나 프레스〉에 한국의 진상을 연재하고,
임시정부 사료편찬회를 조직했으며 〈우리소식〉을 활판 인쇄로 발간하도록 했다.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안창호의 준비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이동휘의 무장독립론으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는 결국 이동휘가 1921년 1월 노령으로 떠나버림으로써 분열되었다.
임시정부가 운동노선에 따른 분열로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영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독립운동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운동의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자는
요구가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국민대표대회주비회(國民代表大會籌備會)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 5인으로 구성된 주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그는 윤해(尹海)와 함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하면서부터
안창호의 소속단체인 북미국민회가 미국에 대하여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문제로
안창호의 대표권 불신임이 제기되었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조시키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결국 안창호가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개조파가 대회불참을 선언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한편 그는 1922년 1월과 1923년 10월 2번에 걸쳐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이광수를 만나 국내에서의 흥사단운동 전개에 관한 방략을 협의했다.
이에 따라 이광수는 수양동맹회를 조직했으며 평양에도 동우구락부를 설립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수양동우회가 1927년 1월경 언론·집회의 자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의 개폐를 중심으로 한 합법적 정치투쟁을 주장하는 방향전환론과 수양단체로의 존속론으로 내부의견이 갈렸을 때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수양동우회 회원인 주요한(朱耀翰)과 조병옥을 만나 수양단체로 존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24년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해외에서 유학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준비교육과 민족관을 가르쳤으며, 그해 12월 미국에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理想村) 가입자와 투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안창호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안창호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안창호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얼굴을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옆에서 엿보지 마라.
안창호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안창호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안창호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 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해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 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 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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