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1월2일
산행 준비를 하고 출근 하였지만 금으로 도배한 절로
계획을 바꾸고 검색을 하였지만 보이지 않는다 .
먼저 다녀온 정현이는 ㅅ 자 밖에 기억을 못하고 120에 문의 하니 문자로 알려 주겠다고
하였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불광동의 위치를 기억해 내어 겨우 검색 된
수국사가 은평구에 있다고하니 맞는 듯 하다.
가는 길에 네비에 검색하니 나타나는데 막상 근처 골목에서
빙빙 돌고 있어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 도착 하였다. 입구는 주택가이지만
절의 뒷편은 작은 산이 막고 있고
절이 그곳에 있을 때는 이유가 있기에 대웅전 앞에서 보니
북한산의 장엄한 능선 흐름이 한눈에 들어 온다.
(금절이라고 하여 검색이 힘들었는지
120에서 뒤늦게 문자가도착 하였다.)
일본의 금각사가 25평인것에 비해 이곳은 108평으로 동양 최대라고 한다.
햇살만 제대로 비췄으면 참 멋있을 광경이다.
교회와 사찰이 대형화 된다는 글을 여러번 읽었고 그것이 큰 폐혜인 듯 여러 사람이
그들의 부채를 거론하며 대단한 사실이라도 발견한 듯 큰소리로 말한다.
언젠가 등촌동의 구의원과 동행시 서강 대교의 야경을 보며 구의원이
무슨 이런 전기세를 쓸데 없이
낭비하는가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어
내가 반론하기도 뭐해 '멋있지 않나요? 라고 말을 한적이 있다.
문화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자원이다. 자긍심을 느끼는 그 풍경이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그 아름다움이 사회의 자원이 되는 법이며
그 자원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지는 것이다.
콜롯세움이나 피라미드 같은 문화 유적이 왜 우리나라에 없는가 반문하는 사람들이
한겨레의 대한민국은 분수 공화국인가 하는식의 비판을 하게 마련이다.
시청의 물줄기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노는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닌가.
쓸데 없이 철근으로 그 높은 에펠탑을 만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비판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방화대교와 서강대교는 항시 불이 꺼진체로 있는 것을 보는데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정말 행복하게 하였는가 궁금하다.
차라리 그들에게 문화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절의 단청은 유지 보수에 많은 힘과 비용이 들며
봉국사의 원 대웅전에서 보듯 가꾸지 않는 건물은
금방 쇠락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들 집이라면 이런 모습이 좋은가.. 넓은 집에서 평화와 조화속에 생활하는 것이 싫은것인가..
사기막 골로 산행시 정말 작은 교회의 간판을 보고 가슴 아파한 적도 있고
북한산성 코스에 절 탑이 시멘트로 된 , 사천왕은 간판으로 세워 놓은 작은 절도 보았다.
이런 곳들도 언젠가 이곳의 금절이 유행에 뒤진것이라며 멋진 작품을 지을 때가 있을 것이다.
지장전.
수국사 문화센터
지장전 옆 작은 길로 이어진 지장보살
칠성각을 간결하게 표현한듯 싶지만 물과 용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용궁을 설계한것 같다..
미륵불. 전체적으로 머리가 무겁게 보인다.
초전법륜상
대한 조계종 수국사(守國寺)는 조선조 7대 세종대왕5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극락 왕생을 위해 경릉 동쪽에 정인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그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성종2년(1471년) 덕종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하여 10월에 낙성하였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
라는 기록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되어있는
아미타좌상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하였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하며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소원을 물으니 스님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면 스님에게 벼슬과 녹봉을 내리면 어떻냐?”로
물으니 이에 스님은 “출가한 자가 국가의 녹을 받으면 외람된다”고 사양하고
다만 서오릉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애석하니 원컨대 근교에다 정사(精舍)를 내리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다며 수국사의 중창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은 “효심과 신심은 본래하나(孝心信心元無二)”라 하고
어명을 내려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6.25동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하여 중창불사를 거듭해오고 있으며,
2005년에 수국사 주지로 부임하였던 토진스님께서
부임당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과 종단에서 조차 파악하지 못한
부채 등 난마처럼 얽힌 사찰의 문제를 풀기위해 수국사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으며 2007년 12월 전 조계사 주지셨던
원담스님께서 새로이 부임해서 사찰의 합리적 운영을 통해 수행과 포교
. 교육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시민과 모든 신도들에게 항상 열려져있는
공간으로 늘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며 다양한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있는 서울 서북부지역의 대표적 사찰이다. -수국사홈피 에서 copy-
천장의 등
절에서의 법당은 넓은 의미에서 부처이기에 부처님께 금옷을 입혀 드리는 뜻에서
법당을 순금으로 입혔다고 한다.
수국사 사적비가 있는 커다란 빈터 .
절 앞의 연립 . 이 주소가 찿기에 오히려 편할 듯 .
전철로는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내려 서오릉쪽으로 가다 보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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