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8
다현이와의 격주 강화 산책길에 오랫만에 부인도 동참하였는데
그렇게 많이 다니던 강화 읍내 바로 옆이라는 사실에 포인트 없이 다니던 방문이 얼마나
스쳐 지나는것이 많은지를 알았다.
뜬금 없이 고려궁지 우측 나무에 매달린 잠자리. 독서실 바로 옆으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어울리는 풍경 같기도 하다.
고려행궁은 고려 시대 몽궐의 침입으로 개성에서 1232년 옮겨 39년 동안 사용한 궁궐이며 1270년 몽골과의 화친시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을 파괴하였고
조선시대 와의 행차에 사용하던 행궁으로 사용하였으나 병자호란과 병인 양요때 재차 파괴되었었다. 크기는 일반 궁에 비한다면 상당히 협소한데
원래는 궁의 규모정도까지 되었으나 민가등에 자리를 내준 탓이다.
병자호란:정묘호란 후 내몽고의 지배에 성공한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의 예를 요구해 왔다. 이에 인조는 전국에 선전의 교서를 내리고 결전의 뜻을 밝혔는데,
이를 안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병인양요:대원군이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고
이로인해1866년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여름에 비하여 생기가 가득한 푸르름은 없지만 겨울의 궁은 흘러간 왕조의 상념을 느끼게 할만큼 적적하기도 하지만
햇살이 비치면 그 만큼의 여유로움을 더 느끼게 한다.
강화유수부동헌(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로서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다.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현재는 명위헌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이 썼다.
강화부는 조선 인조 4년(1626)에 강화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건물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이중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골의 주처석을 놓고 네모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외규장각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학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 왔으나 반환 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2011년 6월 11일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어느 부분에서 친환경 인지
한참을 살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어느 전각이 있던 자리인지 너른 터가 있는 마지막 상층부에서 내려본 전경
강화유수 윤지환이 주조한것을 숙종때의 유수 민지원이 다시 주조하였고 균열이 생기자 강화 역사관으로 옮겼고 이 종은 복제한것을 설치한것이다.
보물 제11-8호. 높이 176㎝, 지름 145㎝, 두께 21㎝. 종신(鐘身)에 있는 명문(銘文)을 통해 1711년(숙종 37)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의 정상부에 있는 용뉴(龍鈕)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고, 종신을 상하로 구분하는 중앙의 횡대(橫帶)는
한국종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이다. 어깨부분에 비스듬히 나온 턱이 있는데
이는 고려동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화형(立花形)의 퇴화형식인 것 같다.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乳廓)이 있는데,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넓은 유곽대(乳廓帶)가 있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종신에 당좌(撞座)가 없는 점,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에 음관이 없는 점 등은 조선 후기 동종의 특징이다.
-상기 음 사전에서 발췌-
(정상부의 쌍룡을 찍은 각도가 좋지 않아 알아 볼수 없다.)
이종의 제작자는 사인비구라는 승려이며 그가 만든 8개의 종이 보물로 지정될 만큼 뛰어 났고 신라 기법에 독창성을 합한 새로운 조선의 양식이 되었다.
이방청(吏房廳)
이방청(吏房廳)은 강화유수부 안에 있는 6방의 건물 중 하나로, 1654년(조선 효종 5년)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다고 한다..
1층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八字)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방 8칸 마루 12칸 부억 1칸으로 총 21칸
규모이다.
밖에서 걸어 못을 친 부엌빗장
고려 궁지를 나와 우측으로 돌아가면 텃밭 비슷한 곳과 하우스들이 있는데 나무 자른 그루터기 위에 묘한 돌탑을 여럿 쌓아 놓은 풍경을 만난다.
고려 궁지 매표소앞 나무에 3단으로 까치가 지은집.
고려 궁지 앞의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성당으로 올라가는 옆의 기와담의 문양 .예전의 궁의 한자락인듯 한데 2개의 터가 있을 뿐이다.
축성 백주년 기념탑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가 오래된것 같은데 한창 보수작업으로 마당이 어지럽다.
성공회 기념비 뒤쪽에서 바라보는 전령 우측의 강화 초등학교 끝나는 부분에 고려 궁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문이 닫흰 성당 내부
강화의 노을은 항시 고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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