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이야기 -/휴식이 있는 공원

앙리 마티즈 특별전

klcyoh 2020. 12. 1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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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마이아트 뮤지엄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18 섬유센터 빌딩 B1 (대치동 994-31)

T. 02-567-8878

F. 02-6488-9881

15,000원

10:00~20:00

무척 자주 들리는 섬유센터인데  지하에 미술관이 있는 것은 현수막을 보고 안 1인. 

마티즈? 차량 이름 아닌가? 오래전에 전시를 들린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이곳에서 또 전시를?

피카소가 많은 아이디어를 차용한 미술가로 기억이 납니다. 

myartmuseum.co.kr/exhibit/exhibit_ing.php?ptype=view&prdcode=2009040001&page=1&catcode=10000000

 

마이아트뮤지엄, MY ART MUSEUM

 

myartmuseum.co.kr

전시기간2020.10.31 - 2021.03.03
관람시간 월-일 10:00 - 20:00 (입장마감 19:00)
마이아트뮤지엄
성인  15,000원
청소년12,000원
어린이10,000원

마이아트 뮤지엄은 2020년 앙리 마티스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국내 최초 마티스 단독 전을 개최한다. 앙리 마티스(1869–1954)는 강렬한 색채의 ‘야수파’의 대표적 화가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본 전시는 마티스가 창안한 고유 기법인 ‘컷 아웃’으로 제작된 <재즈> 시리즈와 드로잉 석판화뿐 아니라, 발레 공연을 위해 디자인한 무대의상, 로사리오 성당 건축 등 다채로운 오리지널 작품 120여 점을 소개한다. 특히 에너지가 넘치는 강렬한 색과 타히티, 모로코 등을 여행하며 영감을 받은 자연의 무늬를 패턴으로 구현한 마티스의 말년의 예술의 순수함을 잘 나타낸 작업들에 초점을 맞춘 특별한 기획전이다. 컷 아웃 작품들은 그 놀라운 단순성을 통해 초기 미니멀리즘의 추상성과 현대 디자인의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 전시는 생생한 색채와 섬세한 선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원작을 통해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동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마티스의 예술을 통해 정서적 위로와 행복의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빛을 차용한 램브란트, 여러 각도의 시선을 넣은 피카소, 무늬를 패턴으로 구현한 마티즈 이들이

이름을 얻은 것은 일론 머스크의 말처럼 아름다움과 영감을 위하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영역을 우리 눈앞에 끌어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네이버로 예약하여 천 원 할인받았습니다. 

 

"콜라쥬가 오일 페인팅을 대치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치할 것이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래 음악사가 바뀌었듯이 미술도 같은 역사적 단계에 와 있다.

이제 비디오 시대에 비틀스 타입의 화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백남준-  

 

오래 전 그의 이야기인데 이미 미술 전시도 그림대신 움직이는 영상을 비추고

화가의 그림에 있는 밀의 냄새와 바람이 부는 전시가 이루어지는것을 봅니다. 

1~4는 그의 댓 상 등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전시품들만 있어서 인지

사진 촬영은 5 전시실에서만 가능하며 들어가기 전 홀 뒤편에 

마티즈의 그림을 걸오 놓은 그윽한 분위기의 카페가 2군데 있습니다. 

마티즈의 생애를 작품 사진을 곁들여  전시한 곳입니다. 

피카소가 마티즈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니 작품을 보니 이해가 가는 듯하며 그가 여기에 

여러 개의 시각에서 본 것을 그렸다는 점도 수긍이 갑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그리기 위한 습작.

성모자.

 

다음 백과 발췌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 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판화, 조각 분야에서도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감각으로 색을 사용했다. 20세기 초반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며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마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늘 경쟁의식을 느꼈다.

1869년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고향에서 서기로 일했다. 스무 살 되던 해 맹장염 수술을 받고 요양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이웃 사람의 권유로 풍경화를 그리면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1891년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이듬해 저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모로는 당시 고전주의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이 공존했던 프랑스 미술계의 다리 같은 존재였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고전주의적 화풍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화법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실험했다. 1895년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하여 학교를 다니면서도 1898년까지 모로에게 그림을 배웠다.

1905년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고 둘은 색과 빛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5년 그들의 전시회를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그들의 그림을 혹평하며 ‘야수(Les Fauves)’와 같다고 조롱했고 이후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다. 1905년 거트루드 스타인의 소개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났고 친구이자 라이벌로 평생 교류했다. 두 예술가는 서로 영향을 받으며 폴 세잔 이후 현대 미술의 양대 축을 이룬 예술가로 성장한다. 1906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와 이국적인 조형물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영향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907년부터는 과감한 색채가 특징인 야수파 스타일을 버리고 장식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아울러 회화에서 인체 형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조각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징병을 면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 당시 그린 그림에서는 마티스 특유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 대신 우울하고 칙칙한 무채색 톤의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파리를 떠나 니스로 거처를 옮겼고, 더욱 강렬하고 대비가 두드러지는 색채를 사용했다.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30년대 이후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과거를 답습한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히티, 미국 등지를 여행했고, 직물 디자인, 유리 공예, 책 삽화, 성당 벽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했다. 1939년 부인과의 이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은 예민한 예술가였던 그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급기야 1941년에는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안락의자나 침대에 누워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작품을 만들었다. 색종이 작품으로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남부 로제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색종이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954년 그가 37년 동안 살았던 니스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니스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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