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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가리봉 오거리

klcyoh 2015. 7. 1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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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2

                       베트남 직원들에게 서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하여 들린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는 구로공단 조성 50주년 기념하여  예전 한국의 수출에 크게 기여한 

                       구로공단 산업 및 노동자 생활상 전시담은 가리봉 오거리 마지막 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그랬다.

                     휴일은 한달에 두번 쉬었다. 우리의 노동계가 쟁취하여 일요일마다 쉰것은 아니였고

                     보령 약국의 라디오 선전에서 할머니가 "일요일은 쉰덴다" 이후 은밀한 욕구가 보편적인 기류로 흐르면서

                     자신을 돌아본 결과 같았다. 공단 오거리 안양쪽의 공단은 버드나무로 바뀌기 전 햇살이 내려쬐는 일요일 한적한 거리에 꿈결같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버스에서 요금을 받고 안으로 사람을 밀어 넣던 여자를 버스차장이라고 불렀고

                    시골 동생의 학비를 보내주던 누나와 형을 문화적인 취향이 맞지 않고 천박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렀다.

                    예전 창씨 개명을 안하고 만주로 피신한 사람들의 후예들을 시간이 많이 흘렀고 같은 이유로 조선족이라고 하는것과 같았다.  

                     하면된다는 저열한 표현 방식은 깊어진 문화성숙의 단절을 더 깊게 하여 부정한 남의 아빠가 더 멋있게 보이게 하였고

                     수출의 자부심을 강요당하고 이로 얻어진 그들만의 부는 집한채 같는것이 더 먼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하였었다. 

                     그래도 고려대 합격하고 입학금이 없어 공장에 들어갔던 태우교역 사장님은 돈 모아서 소를사고 회사 가운을 입고 

                     떠나온 집을 찿아갔었다고 한다. 꿈같은 세월이고 어쩔수 없이 흐뭇한 인생이다. 

                    언젠가 안양천이 범람하여 공단의 많은 공장들이 물에 잠긴적도 있었다

                    안양천 건너 철산동은 난곡보다 더 가난한 동네로  논만 있는 풍경이 었다. 

                    당시 1공단에는 한국과 합작한 YKK지퍼 공장이 있었고 (나중 결별하면서 한국YBS가 만들어짐) 

                    3공단 광안산업 옆에는 모든 수출공산품에 대하여 수출전 국가가 품질 검사를 하는 잡화 검사소가 있었는데 

                    힘이 막강해서 인지 직원이 결혼하면 집 한채 구입할 축의 금이 들어왔었다. 

                    조선인이 만주 군관 학교를? 이건 캄보디아 인이 한국의 육군 사관학교를 입학하는것과 같은 풍경같다. 

                    남로당에서 변신을 하고 재차 다시 변신에 성공하신  그분은 서민을 괴롭히는 깡패를 잡으시고 (이 부분 뒤에 분이 그대로 답습하였고

                    한반도 역사이래 가장 부유한 시기를 만들기도 하셨다)

                    이시기 5명이상 동시 퇴사를 하여도 ,더더우기 반찬의 질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하면 모처를 방문해야 했던 동시대 풍경이였다. 

                    윤치호의 손자는 이나라의 수장이 되었고 이분의 따님도 수장이 되었다.

                    조국을 지켜라 라는 말은 글로벌 시대에 조금은 촌스런 구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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