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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klcyoh 2014. 2. 1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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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6

 

시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높은 압력을 받고 치열한 갈등과 자기 반성을 통해 언어의 보석으로 탄생하고

우리 내면의 영혼에게 속삭이기에 우리는 시인에게 순교자나 선지자와 같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이 쓴 시와 같은  삶을 무의식적으로 강제하게 되는데

박노해 그는 시인이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분노할 줄 아는 투사이고 , 예술가이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1993년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불투명한 가운데 우리 지구의 초상을 기록하겠다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시작한

<하늘에서 본 지구>라는  프로젝트가 어느덧 20여년에 접어들고 있을때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막막함을 이겨낸 그 열정의 모습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것처럼,

또는 조각가 구본주가

작가는 나는 왜 미술을 해야 하는가에서

"나는 어떠한 미술을 하는가로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생각할 줄 아는 방법을 알게 되기까지 .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7 여년간의 방황에서

이후 지금까지 난 무엇을 해왔나 그리고 지금까지의 활동이 앞으로의 삶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만 몰두했다고 했을때 우리는

그 정염의 시간을 지난 그들이 눈을 들어 사람과 인생과 예술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을

기꺼이 공감 할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햇살이 빛나는 만델라이 타웅따만 호숫가에 오리를 치는 판이유(16세)가 나타나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오리들이 금세 모여들어 새 을乙 자로 줄지어 산책을 나선다.

 " 꼬마때 부터 오리들고   함께 놀았어요

기도 할때 마다 오리들이 아프지 않게 빌어요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을 아나봐요"

 드넓은 호숫가를 노닐며 산책하는 오리들도, 오리들의 친구가 되는 소녀도 행복한 아침이다. )

그의 전시에 꼭 가보리라 생각한것은  매체를 통해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 라고 한 그의 한 귀절을 언듯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 노동의 새벽 시집을 보며 그가 현장에서 일했음을 알았고 ,그의 수배와 구속 사형 선고등을 뉴스에서 접하였고

 출감 후의 인터뷰를 ,

지금은 보지 않지만 지식인 인척 오랫동안 구독해온 신동아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24일간의 참혹한 불법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진 그는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 보상금을 거부했다.

우연하게 오늘 전시회에서 바라본 그는 온유한 모습이었으나 시민들과의 대담에서는 그 조근 조근한 목소리에

뚜렸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하였고 치열한 구도자만이 볼 수 있는 시각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물질이 주는 비교의 빈곤의 폐혜를 말하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는 나그네 .....시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공간이 없어 답답할지 모르지만 한때

시인이  느끼는 고독한 정감을 나타내는 삼백리 거리를 같이 걷고 있는 마음에 동화되고 시각과 후각을 같이 공감하고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했던 글이다. 시대가 쌀구 경을 못하던 일제 시대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후 박정희 시대에도 밀주의 금령은 상상을 불허 했을 정도였지만서도 .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한 어려운 말 .

어떤 시인이 말했듯 하루라도 젊을 때 춤을 추겠다는 시인의 심정은 오늘의 나를 살게 하고 내가 나를 사는 치열한 말. 그가 내 잠자고 있는 영혼을 툭 건드리므로 나는 그에게   그가 쓴 시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대는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빛이 있어 아름답고 빛뒤의 어둠이 있어 더욱 선명하다.  

 (이른아침 뻬따꾼 항구에 고깃배가 들어오자 일을 거들어주고 얻어온 생선으로 요리를 한다. 허기진 아이들은 벌써부터 침이 고여 눈을 뗄 줄을 모른다.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밥 한 그릇으로 부터 시작된다는데, 엄마의 삼시세끼  따신 밥상은 말 리 밖에 있어도 나를 끌어 당기는 세상에서 가장 힘쌘 사랑인 것을.)

작가는 오늘 강연에서 학교 급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학교 급식은 잘못된 것이며 식사는 가정에서 책임져야 하는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성의 자유가, 동등화가 여성을 직장으로 몰고 , 자녀들의 식사를 책임질 수 없음으로 인하여

국가가 이것을 해주기 시작했고 이것이 민주주의 다수의 의견이 되자 당연시 되고 법제화 되었다고 비판한다.

 

(꽃농장 인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짜이차를 끓여 마시며 담소중이다. " 내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동료간에 우애의 감정이 돌아야 내가 가꾸는 꽃들도 향기를 건네겠죠 삶 위해 일하고 웃기 위해 돈 버는 건데 일과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하면 되나요

"일터는 "돈터 "만이 아닌 삶터이자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수행터 이고 ,

 동료한 경쟁 관계가 아닌 좋은 벗인것. 아침 해와 함께 멋진 하루을 열어 주는 짜이한잔. )

그가 찍은  카메라는 줌이 안되는 보이는 그대로 찍는 단렌즈이다.

그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은 모든것이 무너져도 영혼이 무너지지 않는 한 결코 무릎을 꿇릴 수 없는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0년동안 그는 빈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왔고 구중에 천그루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절반은 싹도트지 않고 또 절반은 말라죽고

 그중의 소수만이 기적처럼 자라났지요 척박한 비탈에 심어진 나무들에게 미안하고 

이 엄혹한 땅에 살아갈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하지만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기만 한다면

이 얼어붙은 땅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카슈미르에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처음 그는 포토샾으로 흑백의 명함을 짙게 갈라 놓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전시회에서 회색과 흰색

그리고 검정을 그대로 복사히기 민망하여

나는 화이트 벨런스를 무시하고 iso의 감도를 한껏 높여 놓았다.  

 고속도로 위의 오체투어

 

티벳트 초원의 높은 언덕이나 고갯길에는 오색의 타르초가 바람에 나부낀다. 여기에는 티베트 불교의 경전이 적혀 있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은 이 천을 만지면 바람이 경전을 읽어 준다고 여겨왔다.

 광활하고 막막한 초원기리을 달려온 바름은 타프초를 만나 간절한 기원의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사랑의 유랑길에서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  

(나는 짬바를 먹는다. 나는 티벳트 인이다. 보리를 볶아 만든 짬바는 티베트인의 주식이다. 중국은 티벳트를 점령한후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 밀과 쌀등을 강제로 심게 했다. 그 결과 흉작이 들고 수많은 사람이 기근으로 죽어갔다.

티베트인들은 다시 보리를 심어가기 시작했고 고원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소리는

오늘도 티베느인의 저항과 삶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티벳트 문화 유적은 전세계로 흘러나가 변번한 것이 없다고 북촌의 한 박물관에서 유물 전시를 관람하며 그곳 관장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강물은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를 구분 짓는 심연의 경계이다. .....)

 

 

(히말라야 만년설산에서 흘러와 가장 낮은 평원까지 젖 물려주는 인니아의 강 .

마음아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 부디 서두르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아라 ) 

 

 

 

 

 

 

 

 

 

 

 잔소리란 늙어가는 아비의 쓰라린 세상 경험이 아들을 일깨워주는 것이지만 영화에서 총알이 날라가는 것을 즐기는 것과

전장에서 옆 전우의 죽음을 보는 것  만큼이나 차이가 있고 심연을 울리는 음악의 선율을 말로 설명하는것과 동일하다.

 (식민지배에서 부터 군부 독재와 자연재해, 소수 민족의 독립운동까지 격동의역사가 흘러갓지만. 대지에 뿌리 박은 야생의힘으로 깊은 상처만큼 강인한 재생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것은 그가 거부한 그의 과거가 보석이 되어 빛나고 있음을 느낄수 있어서 이다.)  

위키백과  발췌 .

박노해는 1957년 분단된 한국의 남쪽인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산과 들과 갯벌 바다로 둘러싸인 고흥군 동강면 농촌 마을에서 자라났다. 판소리꾼이자 민족독립 운동과 진보운동에 참여한 아버지와 가톨릭 수녀를 꿈꾸었던 어머니가 자아내는 집안 분위기는 그의 유년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그의 형은 가톨릭 사제가 되어 한국 사회 민주화에 앞장선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를 맡았고, 그의 여동생은 수녀가 되었다. 7세 때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운명은 격랑을 타게 된다. 가난해진 집안은 이산 가족이 되었고, 일찍이 찾아온 불운과 고독은 그를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는 16세 때 농촌 고향을 떠나 수도 서울로 이주해 낮에는 노동자로 학비를 벌고, 밤에는 선린상고(야간부)를 다녔다.1976년 노동자가 된 박노해는 건설, 섬유, 화학, 금속, 운수현장에서 일하며 노조결성과 지역 노동자모임을 조직하는 등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고 표현의 자유와 대통령 선출권, 노동 3권마저 유린되던 암흑의 시대였다. 1984년 박노해는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그의 나이 스물 일곱 살,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중에 펴낸 이 시집은 한국 사회와 문단을 충격적 감동으로 뒤흔들게 된다. 군사 정부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이 한 권의 시집은, 수십 년간 무권리 상태로 침묵을 강요당하며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영혼의 목소리가 되었고, 이 시집을 읽은 젊은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는 양심의 북소리로 울려 퍼졌다. 그의 시는 마침내 한국 현대사를 뒤바꾼 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를 지펴낸 하나의 불꽃이 되어,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역사 속에 보여준 생생한 사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군사 정부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7년여를 수배자로 쫓기며 활발한 비밀활동을 하게 되었고,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며 한국민주화운동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989년에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 사회에서 절대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결성,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펴내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그리고 〈사람만이 희망이다1991년 정보기관에 체포되면서 박노해는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었다. 24일간의 참혹한 불법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3년 옥중에서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펴냈다. 감옥에서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맞이한 그는 근원적 성찰과 연구를 거듭하며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지켜가야 하지만 현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잘못됐다. 시대 변화에 맞는 성찰과 쇄신을 통한 새로운 진보이념과 운동을 시작하자'고 발언해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시장만능의 세계화와 낡은 이념이 지배적인 시대 흐름에서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30만 부 가까이 읽히면서, 그의 몸은 가둘 수 있지만 그의 사상과 시는 가둘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1998년 8월 15일, 7년 6개월의 감옥생활 끝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 보상금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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